허탈과 분노로 웃음 사라진 농촌

영광21시론

2002-11-07     영광21
수확을 마친 농촌사회에 웃음이 사라졌다.
올해 쌀생산량이 감소하고 미질이 떨어져 농가수입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쌀농가 소득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10월24일 타결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ead Agreement) 소식은 농촌사회에 허탈과 좌절을 넘어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협상 타결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 농업의 취약한 경쟁력을 이유로 농업부문을 희생양으로 삼은 계속적인 대외협상이 큰 이유다. 42만 마늘농가뿐 아니라 450만 농민의 공분을 샀던 중국산 마늘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연장불가 합의사실 공개로 파문을 일으킨 지 불과 몇 개월만의 일인가.

그런데 이번에 또 세계적 농업강국인 칠레와의 협상에서 여지없이 농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농촌 일선에서는 “왜 외국과의 협상때마다 농업만 희생양이 돼야 하느냐”고 분노한다. 지난 한중 협상의 본질도 휴대폰 시장을 중심으로 한 공산품 수출을 명목으로 가격경쟁력 등에서 밀리는 농업부문을 희생양 삼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정부는 이번 협상 타결로 대칠레 수출의 66%를 차지하는 승용차 휴대폰 컴퓨터 등의 공산품은 즉시 관세가 철폐되고 석유화학제품 자동차 부속품 등은 5년 이내 철폐돼 주력 수출제품의 시장확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쟁점이었던 우리나라의 농산물 양허와 관련해 농가의 어려움을 (정부당국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지만 과연 이 말을 믿을 농민이 누가 있겠는가. 지금 농촌 일선에서 예상하는 피해는 단순 수치 개념 이상이다. 단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생(生)과 사(死)의 문제로 집약되고 있다.

과연 한 국가의 식량문제가 단순 비교우위의 경쟁력 여부만의 문제인가. 그건 결코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학계 내부에서조차 ‘식량안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30여년 후면 우리나라는 물부족국가군에 속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부족한 물은 결국 어떤 형태가 됐든 수입해야 한다. 현재 물값의 몇배가 소요될지는 모르지만 순수 국내산 물값보다는 비싸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설상가상 가격 이상의 문제가 발생할 여지도 충분하다.

마찬가지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공산품에 비해 대외경쟁력이 없다할지라도 농산물은 단순 가격이상의 내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당장은 10원에 수입해 오는 농산물이라 하더라도 자급력이 떨어질수록 수입산 농산물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 유사시때는 안보와 직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죽하면 농민뿐 아니라 농협 조합장들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서 농업부문을 제외할 것을 촉구하고 일선 지자체 의회에서조차 협정 타결직후 반대결의문을 공식 채택했겠는가.
수년 전만 하더라도 추수후의 농촌 인심은 어찌됐든 후했었다. 하지만 작금의 농촌 현실은 심각하기 그지없다.
좌절과 허탈을 넘어선 농심(農心)을 어루만지기 위해선 타결된 협상내용이 전면 재고돼야 마땅하다.
박래규<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