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있던 시험과의 전쟁시대

격동의 세월 20세기④- 수능시험과 과거시험

2002-11-14     영광21
지난 100년동안 영광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의 수능시험, 직업은 물론 결혼까지 결정
출근시간 10시. 경찰차의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이루어 지는 수험생 수송작전. 각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선배들을 위한 기발한 응원전. 시험장 교문에 붙은 찰진 엿조각.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손 모아 기도하는 부모들의 간절한 모습. 얼마전 치뤄진 수능시험 당일의 풍경이다. 이러한 수능시험날의 풍경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세계인들의 눈에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유별나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외신들은 “한국은 한 번의 수능시험이 직장은 물론 결혼까지를 결정짓는 시험”이라며 앞 다투어 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이것으로 ‘시험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의 자살, 방황 등 많은 후유증을 겪고 있는게 사실이다.

서당에서 성균관까지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시험과의 전쟁’을 치루지 않았을까.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수능시험에 못지 않은 시험과의 전쟁을 치루었다. 과거제가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듯이 과거제는 신라때 독서삼품과를 시작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공부한 후 8살이 되면 중앙의 사학(四學)이나 향교에 입학해 수학했다.

그리고 소과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생원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최고학부인 성균관에 입학한 후 대과에 합격하면 관리로 임명됐다. 무과의 경우는 무술 경서 병서 등의 시험을 통해 관리를 충원했다. 과거는 3년마다 치루어지는 식년시가 원칙이었으나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증광시 등이 실시됐다.

응시원서에 4대 조부 신상까지 작성
이러한 조선시대 과거제는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먼저 요즘의 시험제도와 조금 다른 점은 시험지를 본인이 직접 마련하여 시험 10일 전까지 제출하는 것이었다.

시험지를 개인이 마련하다보니, 돈이 있는 사람들은 좋은 종이를 마련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질이 떨어지는 종이를 마련하여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너무 질이 좋은 종이를 마련하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응시원서의 경우 본인은 물론 4대 조부에 대한 신상명세까지 표기하였다. 그리고 응시자가 양인임을 증명하는 보증인(6품 이상의 관료)까지 세워야 했다. 이렇게 작성된 응시원서와 구비서류를 녹명소(錄名所)에 접수하면 과거 응시준비가 일차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당시에도 결격사유가 있는 경우,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즉, <경국대전>에는 응시 결격사유로 ① 국가 관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 자 ② 국가 재산을 횡령한 자의 아들 ③ 재가하거나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의 아들이나 손자 ④ 서얼 자손(문과, 생원진사시의 경우) 등을 꼽았다.

컨닝행위 조선시대에도 있었을까
이렇게 과거에 응시한 수험생은 시험 당일 녹명관이 호명에 따라 입실하였다. 입실 당시 수협관(搜挾官)은 옷과 소지품을 검사하였다. 그리고 부정행위자가 적발되면, 금란관(禁亂官)에게 넘겨 처벌하였다. 즉 부정행위가 밖에서 걸리면 1식년(3년)동안 자격이 박탈 당하였으며, 시험장 안에서 걸리면 2식년(6년)동안 자격이 박탈당했다. 하지만 응시한 사람 가운데 남의 답안지를 바꿔치는 등의 형태로 '컨닝'이 이루지기도 하였다.

과거 응시자의 입실이 끝나면 6척 간격으로 앉게 된다. 그리고 금란관은 시험장 문을 잠그고 시관이 시험문제(試題)를 내걸면 시험이 시작되었다. 정규시험(式年試)은 밤 9시까지 답안지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비정규시는 당일에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그 증서로 홍패와 백패를 각각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영광의 인재들은 많았다. 특히, 100여년전 ‘영광인 양주룡이 무과 초시 3등에 합격했다’는 기록(『각사등록』1885년 2월14일)은 입시철을 맞은 지금 흥미롭다. 당시 과거의 합격은 개인의 영광이자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다.

물론 지금도 고시에 합격하면 ‘경축 ○○○의 자제 고시 합격’이라는 현수막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시험이 갖는 의미는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박이준<목포대 호남학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