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역과 다른 나눔의 장 있었다는 점 특별

법성포 단오제의 역사적 고찰

2004-06-17     영광21
고서 <대동지지>에서는 이 고장의 풍속을 ‘속신귀’ 혹은 ‘사상민예민무농상’이라 했다. 또 찰리사 안 초는 그의 시에서 이 고장을 ‘미속태사전’이라 예찬했다. 그러나 정작 법성포단오제가 어느 시기부터 제전적 격식을 갖추고 정착됐는지에 관해서는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술회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사료를 토대로 여건을 종합하고 배경을 분석하면 긍정적인 답은 나온다.법성포는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중국과의 거래가 있었을 만큼 수로가 발달됐던 곳이다. 때문에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에는 불교가 동진에서 마라난타존자에 의해 도래됐고, 고려때에는 국가 중추기관인 조창이 설치됐다.

그러나 이 고장에서 단오가 대중적 행사로 된 것은 적어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루고 난 인조 15년(1637년) 이후였을 것이다. 이 고장에 수군의 기지인 법성진이 설치된 것은 중종9년(1514년)이며 역시 숲쟁이에 진성의 연장으로써 조림을 한 것도 그때였지만 최소한 130년이 지나고서야 그 수목에서 추천(그네)이 가능하게 됐을 것이다.

법성단오 대중행사로 정착된 요인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법성포의 파시와 연결짓는 일이다. 옛날이나 지금을 막론하고 대규모 행사에는 재정수반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 더불어 단오절은 시기적으로 법성의 조기파시와 일치한다. 그리고 법성포는 유독 토속신앙이 민감하던 고장이다.

이유는 지리와 경제면에서 찾아야 한다. 본래 법성포는 삶의 터전을 삼고 활동하는 곳이 모두 바다이다. 조운선이 그러하고 수군도 그러하며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등에 칠성판을 지고 다닌다 하지 않는가?

우선 해상의 일상만사가 무사하고 재수대통의 소원때문에 산에는 여제단을 설치해 성황리에 고사를 올렸고 바다에는 용왕제와 풍어제를 올렸다. 그와 같은 일편의 희망과 여건이 상호부합돼 법성포단오제는 일취월장 그 제전의 규모가 방만해지고 행사의 내용 또한 다채로워졌다.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보부상들의 역할이다.

임·병 양란 이후 그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정비했기 때문에 상고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발휘했다. 재력 외에 신속한 정보와 홍보의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유교의 전통적 윤리관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매우 경시됐으나 하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양심과 가난한 자를 도와줄 줄 아는 의리의 조직이었다.

동해안 강릉과 서해안 법성포
구전에 의하면 그들은 법성의 유수한 물산객주 등과 백목전계라는 협동조직을 결성해 그들이 행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전야에는 앞바다에 유람선을 띄우고 삼현육각을 잡았으며 당일에는 먼저 인의산에 있는 여제단의 서낭신에게 고사를 했다. 본 행사는 숲쟁이 녹음방초위에서 순차대로 진행이 되는데 씨름과 추천을 시작으로 각종 예능들의 경연방식을 취했다.

가인금객은 팔도에서 모여들었고 장원을 함으로써 명인명창으로 인정을 받았다. 예로부터 동해안에는 강릉단오제, 서해안에서는 법성포단오제가 있어서 가히 쌍벽의 세를 과시해왔던 깊은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법성포단오제는 나눔과 어울림의 한마당이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다른 지역의 단오제가 어울림만 있고 나눔의 장이 없는데 비해 법성포단오제는 나눔의 장이 있었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하겠다. 단오절이 되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싸와서 이날만큼은 남녀노소나 귀천의 구별없이 서로 나눠 먹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언제부터인가 당연한 일로 인식돼 단오날은 굴비를 ‘나눠먹는날’로 자리매김을 해 지금까지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