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잣대로는 과거사 청산을 할 수 없다
데스크칼럼 - 박찬석 / 본지편집인
2004-08-19 영광21
그동안 친일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특별법, 한국전쟁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법, 5ㆍ18특별법,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과거역사의 청산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가기관의 무성의와 기득권세력의 반발 등으로 제대로 된 정리와 반성없이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시점에서 포괄적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고 국가기관이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이는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근현대사의 뒤틀린 과거의 매듭을 짓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과거사청산의 명분에 대해 일부 야당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행위이며 정략적인 접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그것도 광복절 기념식에서 부끄러운 과거의 청산을 언급했음에도 곧바로 정략적이라는 반발이 나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당의 반발은 근자에 있었던 친일규명과 정수장학회 등을 둘러싼 국가정체성논란을 돌이켜보면 전혀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도 두려운 일일 것이다.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여권에 정국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듯하다.
과거사 문제가 정치적 상황에 의해 또다시 왜곡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지만 어차피 주어진 조건이라면 중요한 것은 ‘국민의 뜻’이다. 국민의 지지와 성원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가 국내정치용 정략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과거사청산에 대한 진실된 의지를 밝히고 국민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명분을 통해 반발을 제압하고 성과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 수미일관한 태도 당당한 자세가 요구된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는 과거사 청산 프로그램은 뭔가가 빠져있다. 절박함은 있지만 진실성이 없다.
노대통령은 반민족친일행위의 규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일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겠다고 한다. 지난달 21일 한일정상회담때 노대통령은 고이즈미 일본총리에게 “임기동안 한일간 과거사 문제는 공식적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취임초기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혹자는 실리외교라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로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사에 책임이 있는 외세에 대해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가 ‘과거사청산’을 힘있게 전개할 수 있을까. 이것이 노무현 정부가 가진 이중잣대의 문제점이다. ‘과거사청산’과 같은 고도의 명분싸움에서 이중잣대는 정쟁의 수단을 제공하고 또다른 형태의 역사왜곡을 가져올 뿐이다.
친일문제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유신독재와 군사정권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용서와 화해는 있을지언정 은폐와 왜곡은 있을 수 없다.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 진정한 국민의 뜻을 헤아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