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을 막으랬지, 선물을 막으랬나!
데스크칼럼 - 박찬석 / 본지편집인
2004-09-23 영광21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수출이 호조여서 국가경제가 흑자라고 연일 떠들어대고 있다. 국가경제가 흑자라면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들의 주머니가 채워져서 소비가 늘어나야 하는데 무슨 연유로 내수는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인가? 국민소득은 늘었다고 하는데 소비는 갈수록 줄고 있으니 늘어난 소득은 전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생산-판매-소득-분배-소비의 행위가 되풀이되는 과정을 경제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된 사회에서의 경제에 대한 정의는 ‘정당성’이란 말에 의해 가늠된다. 이 정당성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와 특별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 하나는 생산에 기여한 만큼 그 분배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분배된 몫이 다음의 생산에 투입될 노동력을 다시 만들어낼 만큼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현실에서는 ‘공정하고 충분한’ 정도라는 분배과정이 생략되어서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 물론 소득에 따른 분배가 있으면 투자도 해야 하고, 세금도 내야하며 또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개인적 차이가 있어서 실제로는 수준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수준을 웃도는 부류와 그에 밑도는 부류의 격차가 사회적으로 허용될 만한 기준을 넘게 되면 공정성의 원칙은 깨지고 만다.
예컨대 미국의 쌀이 수입되면 우리나라의 쌀 생산 농가는 초상이 나지만, 국내의 쌀 소비자들은 다소 덕을 보기도 한다. 반면에 농민의 손해를 담보로 미국에 자동차나 텔레비전을 수출하는 기업들은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된다. 실제로 정책당국자들은 공산품 수출에 따른 이익이 농민에게 미치는 손해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국가경제에 막대한 득이 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주장한다. 당하는 편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책임한 ‘자화자찬’에 불과하다.
요컨대 경제정책이란 각종 이해가 상반하는 모든 계층에게 똑같이 공평하고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에 사회구성원 다수를 지향하는 시책들이 수립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무릇 민주정권이라면 더욱 그렇다. 덧붙여서 추석명절을 앞둔 이 지역 상인들이 당국자에 느끼는 감정은 실로 험악하다.
이 지역 특산품 중 가장 으뜸은 ‘굴비’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 굴비상가의 대부분이 근래에는 명절에 판매하여 얻은 소득으로 한 해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실정의 지역경제에 더욱 찬물을 끼얹은 것은 강압적으로 실시한 ‘선물 안주고 안받기’의 후폭풍이었다.
물론 우리 사회가 뇌물과 청탁으로 많이 혼탁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의 오랜 미풍양속인 최소한의 오고가는 정마저 금지시킨 것은 해도 너무 했다. 정부에 막강한 공권력을 위임한 것은 서민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액수가 오고가는 비리를 근절하라는 것이지 서로의 정을 주고받는 선물조차 못하게 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지금의 정부정책은 한마디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 꼴이고,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운’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