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그 중심에 선 영광의 인물들
■ 영광의 3·1운동과 독립선언의 주역들 ②
영광에 있어서 만세운동은 15일 이후 민족독립의 의지를 환기시키면서 영광 전지역에 확산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찰서 진입에 따른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곧바로 영광읍과 법성포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3월27일에 영광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돼 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은 1919년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에 잘 나타난다.
피고 서순채·김준헌·유봉기·조병완 등은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기 위해 동월 27일, 다수의 조선인들이 동 목적하에 공동으로 영광읍내를 2차 때와 같은 형태의 시위운동을 행하기 위해 선동하기로 상모하고 동월 26일 피고 유봉기의 집에서 구한국 합병전 동국 내에서 연소 자제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만든 <유년필독>의 서책 중에서 ‘수·당은 우리의 패장이오, 일본은 우리의 제자로다’, ‘독립의 권리를 잃지 말고, 세계 일등 우리 대한’등의 두 단구를 인용, 애국가라 칭하는 것을 만들어 그것을 약 20매 동 영광면 부근의 인도에 뿌리도록 유봉기는 지시했고 조병완과 조희태는 그에 따랐다.
이 운동은 이들 졸업생을 중심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구금된 독립지사들을 구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전남도장관은 총독에게 올린 <미발에 방지한 건>이라는 제목으로 “3월27일 영광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이 중심이 돼 전회 소요시 구금됐던 생도의 방면을 요구할 목적으로 동교 생도를 선동해 소요를 일으킬 계획 중임을 탐지하고 익일 28일 오전 9시,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 두 개와 태극기 등을 압수, 수모자 5명을 검속함으로써 이후 평온하다”고 보고했다. 이는 14~15일 1차 만세운동에 기반을 두고 이를 계승한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데 바로 김준헌·서순채·유두엽 등은 1차 운동을 점화시켜 민족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일제의 검속을 피한 후 이를 다시 주도한 지사들이었다. 이들은 26일에 애국가 삐라를 만들어 남천리 사거리 부근 노상에 살포하고 27일에는 유두엽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 통제 속에서 오후 3시에 거행하기로 한 만세시위는 좌절되고 서순채·김준헌·유두엽은 체포돼 15일에 구속된 독립지사들과 함께 동일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모두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와는 별도로 이 무렵 법성포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실행되고 있었다. 물론 이 거사도 시위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를 주도한 지사들이 체포돼 그 과정을 당시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피고 박명서는 조선은 독립국이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그 운동방법으로서 다중이 공동으로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시도해 대정 8년(1919) 3월31일 전남도 영광면 법성포보통학교에서 동교 교사 나계형에 대해 우리 고장에서도 생도 전부를 참가시키겠다는 뜻을 고하고 동교 생도 약 10명에 대해 전시 운동에 참가해야 한다는 뜻을 고해 동인 등을 선동함으로써 공공의 안녕질서를 방해했다.
동 주재소에서 나계형에 대한 신문조서 중에 ‘3월31일 박명서가 학교에 와서 나에게 하는말이 “요사이 각처 학교에서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 전원이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명령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하기에 나는 응낙했다.
이처럼 법성포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학생 박명서와 교사 나계형의 주도로 추진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박명서가 ‘우리 고장에서 하지 않고 있으니’라고 말한 것은 일제의 탄압으로 거대한 운동이 재점화되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1차와 같은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나계형은 일찍부터 법성포지역에서 모교 후배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면서 영광읍의 운동에 크게 고무돼 있었으며 학생들 대다수가 참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다한 지사였다. 따라서 두 지사가 서로 만난 날은 위의 내용과는 달리 31일이 아니라 26일이었을 것이며 이를 계기로 구체적인 거사계획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나계형과 박명서를 정점으로 한 학생 최복섭·나질순·송택규·배차정 등이었으며 당시 고향에 온 휘문학생 신명희와 일반인 유영태도 가담했다. 이들은 4월1일에 중리 당산에서 거사하기로 확정한 후 진내리 박명서의 집에서 국기를 제작한 후 30일 오후 11시 법성우편소에 10장을 투입하는 등 하나씩 계획에 따라 실행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탐지됨으로써 4월1일 거사 장소에 모여 들던 지사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법성포보통학교의 대대적인 시위행진은 무산되고 박명서와 유영태·최복섭은 체포돼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특히 이 운동을 주도한 다수의 지사들은 독립의지와 의협심이 강했던 박명서가 일제의 탄압에 맞서 “배후에는 아무도 없으며 주모자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고 진술해 방면됐다.
이처럼 영광에서는 15일 이후 만세운동이 실행되고 있었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시위행진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이 태극기를 제작하고 유인물 등을 살포했던 것이므로 단순히 실패로 끝난 운동 형태로 규정지을 수 없다고 평가된다.
물론 이후 영광에서 그 이상의 거사 계획과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전개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는 15일의 만세운동이 영광경찰서까지 진입할
정도로 대내외에 표명된 독립쟁취가
강했기 때문에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이 자행된데 그 요인이 있었다. 더구나 현재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가로놓여 있지만 영광군 전역에 걸쳐 ‘산발적 시위’가 일어났으며 영광출신의 외지 활동이 다양하게 전개됐다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영광의 3·1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 시위와 횟수에 관계없이 4월 중순부터 퇴조하기 시작했지만 그 이듬해 3월까지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의 지역적 성격과 의의
일제는 3·1운동이 전민족적 항쟁으로 전국에 확산되자 군대와 헌병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으며 조선군사령관에게 발포 탄압을 명령했다. 일제가 축소한 공식 집계만으로도 7,500여명이 피살됐고 당시 수원 제암리교회의 집단방화 학살은 일제의 극렬한 탄압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탄압에 대항해 헌병분견소와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운동의 양상도 격렬해졌으며 일본인의 철퇴와 식민통치의 완전 종식을 요구했다. 물론 3·1운동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 속에서 4월 중순 이후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지만 헌병분견소와 경찰서 습격 등을 비롯해 이듬해 3월까지 파업·봉기·맹휴·철시 등으로 지속됐다.
영광에서도 7,600여명이 참여했으며 사망자 6명·부상자 50명·체포 27명·투옥 16명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3·1운동 이후 영광의 독립운동 성격은 이를 주도한 일련의 독립지사들과의 관련성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광복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걸친 영광의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광에서도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여기에는 3·1운동 이전 민족독립을 고취시킨 교사들의 사상적 영향이 컸다. 위계후는 당시 나이 30세인 1914년에 영광보통학교로 부임해 조 운의 누이를 아내로 삼으면서 사실상 영광이 고향이 됐다. 그는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다하다가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
또 위계후보다 3살 아래인 고경진은 1910년 이후 모교에 잠시 재직하다가 일장기를 찢어 처벌을 당한 후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이들은 대동단사건의 재판기록인 위계후의 조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대정 8년(1919) 3월5일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쫓겨 정처 없이 방랑하던 끝에 국경 밖으로 탈출해 자유의 몸이 되고자 생각하고 있던 차에 7월 상순 종로에서 조종환을 만나 나의 숙소인 덕흥봉에 갔다. 피고 유경근과는 관철동 조선여관과 남문 밖 신행여관에서 3회 정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포염에서 군인과 교관을 양성 중인데 그 곳에서 군인을 양성하는 목적은 장차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조선여관에서 이러한 말을 들은 사람은 나 말고 고경진·조종환 등도 있었다. 나는 군인을 지망하겠으니 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4~5일 후 노준이 와서 조종환으로부터 나의 군인 지망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자기도 국외로 나아가는 것을 희망하고 있지만 여비가 없다고 탄식했다. 1주일쯤 후에 여비는 준비됐지만 경계가 엄중해 국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무렵 나의 처남 조주현(조 운)도 유경근의 소개로 신의주로 가기로 했지만 전일과 같이 경계가 엄중했다. 동향인인 조규상도 동행하기로 한 바 있다.
이처럼 이들은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을 절감해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 소속의 도동리 출신 노준의 제의로 노령에 설립 중이었던 사관학교에 지망했다. 그러나 고경진은 성공했지만 위계후는 체포당하고 말았다.
특히 이들과 친인척 관계에 있었던 고형진과 남궁현(1901~1940)도 독립지사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바로 고형진은 고경진의 동생이었으며 남궁현의 누이는 위계후의 며느리였다. 이들은 법성포보통학교 출신으로 전주 신흥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는데 3월13일에 3·1운동이 전개되자 이를 주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돼 징역 6월을 최종 언도받았다.
이후 고형진은 고경진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에 전념하다가 지병을 얻어 죽었다. 남궁현은 군자금 모집과 함께 굴비전기건조기를 발명하는 등의 수익금으로 독립지사들의 가족들을 적극 돕다가 다시 검거돼 2년 6월을 복역한 후 신간회 활동으로 다시 2년간 투옥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5년 6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특히 군남 백양리 출신으로 법성면 은선암의 주지로 있었던 양태(1885~?)의 행적도 주목된다. 그는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고 3·1운동을 목격한 후 3월23일 임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둔남면 계수장터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 “우리 2,000만 동포는 이 때 조국의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일치단결을 해야 하며 그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만세를 결사적으로 불러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로써 임실에서도 처음부터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일인 상가를 불태워 식민통치의 완전 종식을 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형량은 매우 무거워 초심부터 최종 5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러한 영광의 3·1운동은 한국사 전체에서 이해되는 것으로 민족독립운동의 고양과 독립 쟁취의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물론 민족자결의 원칙이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세계정세 속에서 외교적 청원주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3·1운동의 대중적 확산단계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이 행사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은 전 계층이 전근대적 성격을 일소하고 식민통치의 완전 종식과 독립 쟁취라는 하나의 목표와 방법으로 전개한 거국적 항일투쟁이었다. 또 해외에서도 국내의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됐으며 이를 토대로 간도와 연해주에서 각 단위부대가 편성돼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개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무장투쟁의 필요성과 함께 독립운동을 일원화하고 민족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3·1운동은 전 세계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계기가 돼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킨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
특히 영광의 3·1운동 과정에서 보통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활동은 주도적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자부한 항일운동의 선봉이었다. 이들은 1926년 6·10만세운동에 이어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1930년까지 전국에서 194개교의 5,4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하고 피검자가 1,642명에 이르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현재 영광의 광주학생운동은 자세하지 않지만 영광 출신으로서 광주 등지에서 참여하다가 퇴학과 옥고를 치른 교사와 학생 일부가 확인된다. 이러한 3·1운동의 의의는 영광의 고형진과 남궁현이 대구복심법원에 제출한 항소취지문에 그대로 반영돼 있으며 장차 일제의 만행 규탄과 독립지사들의 석방, 한국독립에 입각한 동양평화를 역설한 명문장으로 평가되리라 본다.
지금 일본은 아라사와 청국의 두 번 싸움에 이긴 여세를 몰아 무력적 수단으로 우리의 상국을 빼앗고 매국노 이완용·송병준·조중응 등과 결탁해 우리 임금을 협박해 을사조약·정미조약 등을 강압적으로 체결해 우리나라에 대해 견딜 수 없는 학대와 고통을 줬다. … 구파전쟁이 끝나고 불란서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서 한국의 대표가 민족자결주의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천명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천리에 어긋남이 추호도 없는 것이다. 이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애국적인 수만명의 동포들을 그들은 총검으로써 살상하거나 투옥해 고문하니 치안을 어지럽힌 죄인은 바로 그들이지 우리가 아니라 천인이 공노할 죄악의 작폐는 그들이 영원히 우리 조선의 주권과 삼천리강산을 무력으로써 강식하려는 흉계를 반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들의 나라는 본래 미개국으로 작금 오천년 동안에 성야의 문명을 수입해 무력의 우세를 자랑하는데 불과하나 우리 조선은 단군 개국 이래 오천년의 문화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 고구려나 신라, 백제 때에 한창 우리 문화와 무력이 우세했을 때에도 결코 그들의 나라에 한 점 누를 끼친 일이 없을 뿐더러 백제 때에는 왕인박사를 보내어 학문과 예법을 가르치고 많은 공인과 예술가를 파견해 그들의 문명과 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은인이기도 하다. 이는 그들의 총검에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가며 또 인도를 저버린 모진 고문을 견디면서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어린 소년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대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강요하는 데로 조선혼이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증명하는 일이 아닌가. 조선은 역사적으로 형제의 우의로써 지내온 나라이다. 이번의 독립선언 시위는 결코 배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 우리나라가 독립국임과 우리민족이 자주민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며 이는 우리의 당당한 권리이며 누구도 이를 침해할 수 없는 천리인 것이다. 그들은 이 떳떳한 우리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그래야 동양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어찌 우리 조선의 독립운동을 배일주의로만 몰아붙일 수 있을 것인가. 빼앗기는 조국과 짓밟히는 민족을 구하려는 피맺힌 투쟁이 어찌해 죄가 되는가, 이는 법이기 전에 양심과 윤리와 인도의 문제이다. 금번 독립운동에 연루돼 체포 구금된 모든 애국동포들을 무죄로 석방해 줄 것을 복심법원에게 항소하는 바이다.
정 택 근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영광문화원지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