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조명 26 - 영광교육의 발자취 ④
3·1운동후 교육열 고조돼 설립 바람…지역인재 양성 역할 톡톡
2005-09-14 영광21
영광중학교 기성의 꿈이 무산된 지 1년이 지난 1926년 당시의 영광군수 권중식(1925~1928년까지 재임)이 실의에 차 있는 군민의 심정을 헤아리고 이 고장에 중학교를 세워 군민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 보겠다고 결심하고 당시 영광에서 소작료 1천석 이상을 수입하는 지주를 조사한 바 영광읍에서 조희경 노문엽 정동명 허 관 조희양 조사욱과 백수면의 지용회 군남면의 김상기 등 8명이었다.
권 군수는 전기 8명의 지주들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여 벼 3백석씩을 희사받기로 작정하고 그 교섭에 나섰다. 제일 먼저 그 중의 한사람인 허 관이 평소 중학교 설립에 대한 뜻이 누구보다도 간절함을 알고 그와 친분이 두터운 배삼숙을 통해 그 뜻을 전했던 바 허 관은 선뜻 단독으로 벼 3천석을 내놓겠다고 승낙하고 정헌영으로 하여금 대필케 한 기부승락서를 권중식 군수에게 전달했다.
권 군수는 기부승락서를 받은 즉시 중학교 설립에 착수했으니 영광읍 무령리 관람산 남쪽 기슭에 학교부지 7천평을 매입하고, 교사 6실과 기숙사 2동(8칸), 교장관사 1동 그리고 창고와 변소 등 부속건물 3동을 신축하고 실습농지 3천평을 매입해 1927년 5월20일 영광농업보습학교 2년제 2학급 인사를 얻어 개교했다.
영광농업보습학교는 이 고장에 많은 인재를 양성해 배출한 유서깊은 학교로서 1945년 해방과 함께 학제변경으로 4년제 농업중학교로 바뀌었다가 1954년 12월30일 영광서중학교(민립중학교)와 통·폐합돼 그 자리에는 영광여자중·고등학교가 설립됐다. 오늘에는 영광여자중학교만 남아있다.
법성사립보통학교
1907년 법성면의 독지가 이장섭 이택섭 형제가 옛 조창 자리에 사재를 들여 법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서 최한규 계희선 두 분을 교사로 초빙해 교단을 맡겨 법성에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특히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당시 법성보통학교를 졸업한 고경진이 은사인 최한규 선생의 추천으로 큰 뜻을 품고 평양대성학교에서 수학하고 향리로 돌아와 최한규 선생의 뒤를 이어 모교의 교단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학교 재직기한 동안에 하루도 학교를 떠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침식을 학교 숙직실에서 해결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정신을 주입하고 배일사상과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생활로 일관, 법성에 유일한 민족운동의 굳건한 보루를 이루어 놓았다.
그후 그는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지마는 법성보통학교는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받아 법성포초등학교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농질마재보통학교
3ㆍ1운동 직후 영광 전역에서 교육열이 고조돼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는 뜻있는 이들이 학교 설립에 나서던 무렵, 홍농의 토호 김양수는 홍농면 계마리에 있는 자기 소유의 제각을 개수해 교실 2칸과 숙직실과 변소 등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당시 영광청년회 임원이었던 서순채를 교장으로,
정태원을 교사로 초빙해 1922년 4월에 개교했다. 이 학교는 홍농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로 편입되던 1927년까지 일제의 심한 감시와 탄압속에서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의 의지를 심어 홍농에 많은 인재를 양성·배출한 학교로서 그 이름만은 지금도 남아있다.
백수보통학교
1923년 5월15일 개교한 사립보통학교로서 백수읍 천정리의 독지가인 김영후가 홀로 되신 고모 김씨 부인과 아버지 김순병의 유산으로 두 분께서 생존해 계실 때 남긴 유지를 받들어 설립, 초기에는 천정학당(天定學堂)이라 이름해 운영했다.
점차 학생의 수가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그 시설규모를 확장하고 학교 명칭 또한 백수보통학교로 고쳐 운영에 열성을 다함으로써 오늘의 백수중앙초등학교(?)가 되기까지 이 고장에 많은 인재를 양성한 유서깊은 학교이다.
지금도 학교 교정에는 홀로 되셨다가 많은 유산을 남겨 친정 조카인 김영후로 하여금 학교를 설립토록 한 김씨 부인의 뜻이 담긴 기념비가 서있다.
정명학교
1926년 영광중학교기성회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체하게 되자 박정환은 군서면 월곡리에 교실 4칸과 부속건물 2동을 신축해 정명학교(正明學校)라 이름해 3ㆍ1운동 당시 주역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루고 출감한 박태엽을 교장으로 초빙했다.
정명학교는 군서면 일대의 불우하고 가난한 농민들의 자제들을 위해 개교한 보통학교 과정의 학교로서 개교직후부터 일제의 온갖 탄압과 감시를 받아 설립자인 박정환이 경영하는 영광읍 남천리에 위치한 직물공장이 먼저 문을 닫게 되자 정명학교 또한 운영난으로 개교한지 3년만인 1929년 10월 폐교하고 말았다.
영광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
1935년 5월21일 설립인가를 얻어 동년 6월10일 개교한 영광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는 영광읍 양평, 우평, 입석, 연성, 계송 등 각 리에서 영광읍 무령리에 위치한 영광보통학교까지 약 4km에서 6km까지의 먼 거리를 도보로 통학하는 농촌벽지의 어린이들의 딱한 처지를 보고 영광읍 교촌리에 거주하는 독지가 김순용이 영광읍 계송리에 터를 닦아 학교 설립비 전액을 부담해 4년제 학교로 설립됐다.
그후 1943년 6월7일 영광서공립보통학교로 승격돼 1950년 5월1일 영광서국민학교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호 계속
사진설명 : 1920∼30년대 영광지역 곳곳에서는 민족의 미래를 위한 후진양성과 독립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각급 학교가 설립됐다. 사진은 영광여중과 법성포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