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세월 20세기 ③ - 명당에 얽힌 이야기
며칠 전에 있었던 모 방송국의 저녁 9시 뉴스 멘트를 재구성한 것이다. 페스파인더호가 화성을 탐사하는 21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뉴스인 저녁 9시 뉴스 멘트라고 보기에는 웬지 어색하다. 하지만 현재에도 한민족의 생활 한가운데 풍수는 낯설지 않은 존재다.
주지하듯이 풍수지리는 고려시대 묘청의 난으로까지 발전했다. 고려시대에는 도선의 ‘계시’에 따라 수도와 절터를 예시할 정도로 ‘풍수의 나라’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풍수에 대한 애착은 무학도사와 경복궁에 얽힌 일화로 유추해 볼 수 있다.
21세기 현재에도 대부분 지관이 정해준 ‘명당 자리’에 망자를 모시는 것이 당연한 도리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집터, 마을터 등 모든 자리는 ‘명당’에 위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명당에 들어가는 것 역시 길일(吉日)을 택하는 등 정성을 다한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조상에 묘자리를 잘못 써서 그렇다’는 등 ‘조상 탓’을 하기도 한다.
조상을 명당에 모시는데 무엇인들 못하리오
그러므로 조상을 명당에 모시는 것은 곧 ‘후손 발복’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명당을 구하기 위해, 또 명당에 조상을 모시기 위해 후손들은 ‘밤 이슬’을 맞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즉, 투장(偸葬)이 그것이다.
투장은 명당자리에 몰래 시신을 안치하는 것을 일컫는다. 투장의 방법은 남의 선산에 밤을 이용해 몰래 묻거나, 명당에 위치한 묘 바로 옆에 묻은 후,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平葬)을 하는 등 그 방법은 다양하였다.
100여년 전 영광 사람들도 조상을 명당자리에 모시기 위한 ‘명당과의 전쟁’을 치루었다. 『민장치부책』에 나온 사례 가운데 상당 부분이 투장과 관련된 기록이다. 그 실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광 구수면에 살던 박○홍은 남죽면의 김○신의 선산이 명당이라는 소문을 듣고 밤에 몰래 김○신의 선산에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흥덕으로 이주하여 버렸다. 이에 김한신은 영광 수령에게 박○홍을 잡아와서 빨리 시신을 파가도록 해달라고 소장을 올렸다. 이에 수령은 ‘박○홍을 잡아 와서 바르게 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1870년 6월24일). 박○홍의 투장 사례는 그래도 신사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명당에 위치한 분묘 위에 투장한 사례까지 있었다. 즉, 마촌면 임○하는 ‘제 아버지 분묘 위에 이○길이 명당 자리를 탐내어 투장을 하였습니다’는 내용의 소장을 관아에 올렸다. 이에 영광의 수령은 ‘이미 전에도 이와 같은 판결이 있었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판결하였다. 당시 투장으로 많은 소송이 제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명당
얼마 전 고고학을 전공하는 한 선생님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분 말씀이 고분을 발굴하다 보면, 고분 위에 묘가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고분의 규모가 동산 정도의 크기이므로, 이후 고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묘를 쓴다는 것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걸쳐 묘 위에 묘를 쓴 형국이다.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당과 중세 및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명당은 일치하였나 보다. 이렇듯 조상들의 명당에 대한 애착은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러한 애착은 효에 근거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은 ‘후손이 찾아가기 쉬운 곳이 명당이다’고 우스게 소리를 한다.
또 실제 그러한 현상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장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게 사실이다.하지만 망자를 위한 진정한 명당은 가신 분에 대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박이준<목포대 호남학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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