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은 시대적으로 뚜렷한 발자국남겨
법성은 시대적으로 뚜렷한 발자국남겨
  • 영광21
  • 승인 2004.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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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창 천년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992년은 한반도를 고려가 통치했고 조정은 성종이라는 어진 제왕이 있어 국태민안을 구가했다. 이 고을은 역시 영광이라 했는데 그때 법성에는 부용창(芙蓉倉)이라는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이 설치됐다.

이때 조정은 한강 이남에 12개소의 조창을 두었는데, 곡창지대인 전라지방에는 반이나 되는 6개소의 조창을 두니 부용창은 그중의 하나이다. 당시의 법성은 진개부곡(陣介部曲)이라 해 지금의 용성리에 있었고 조창도 대덕산 뒷자락 지금의 고법성(古法聖)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국내적으로 노쇄현상이 나타나자 왜구의 약탈이 극심해졌다. 그들의 해적행위는 해상에서 그치지 않고 조창에까지 도전해 와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새로운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잠재우고 조운(漕運)을 재개했다.

이때 조창은 대폭 개편돼 전국에 9개, 전라에 3개로 축소됐다. 때문에 각 조창마다 수세지역은 넓어 갔다. 종전의 관할지역에 관해서는 문헌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복창(復倉)되면서는 영광을 위시해 옥과 담양 장성 정읍 곡성 순창 고창 창평 흥덕 부안 함평 진안 무장 고부 등15개 군현(郡縣)을 맡았다. 이때에 조창의 소재지도 법성포로 이전됐다.

그러나 120년이 지난 중종 7년에는 법성창에 대대적인 변혁이 왔다. 이웃 나주에 있던 영산창이 제반 사정때문에 폐창(廢倉)되면서 법성창에 병합된 것이다. 이로써 법성창은 무려 28개 지역을 관할하는 국내 최대의 거창(巨倉)으로 일약 발돋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군사기지(軍事基地)를 설치했는데, 최초에는 만호진(萬戶鎭)이라는 소규모의 수군(水軍)을 주둔시키는데 그쳤다. 하지만 점차 그 규모가 커져 116년 후인 인조8년(1630년)에는 첨사진(僉使鎭)으로 했다가 정조13년(1789년)에는 독진(獨鎭)으로 승격됐다.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는 품계로는 종3품에 지나지 않지만, 독진이 된 후로는 진량면(陳良面)의 행정일반까지를 영광군수의 관할 밖에서 집행하게 돼 거창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위세가 당당했다.

그후 수백년 동안 존재해온 법성포의 조창도 시대적 변천과 국가적 비운으로 인해 서서히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전초전을 펴던 1800년대 말까지도 명맥이 유지됐던 것 같다.

이상에서 주마간산(走馬看山)이나마 법성포의 조창사(漕倉史)를 회고했는데, 역시 법성포의 역사는 근원을 조창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조창이 있었기에 수군이 있었고, 조창과 수군은 국가에 재정과 군사적으로 크게 공헌하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 ‘법성은 삼국시대에는 종교적으로, 고려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조선시대에는 군사적으로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여하튼 그러한 맥락에서 법성창 천년의 역사를 긍지와 자부로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