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삶의 터전 형성·팽나무 그윽한 정기
임진왜란때 삶의 터전 형성·팽나무 그윽한 정기
  • 영광21
  • 승인 2004.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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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마을이야기 ① - 묘량 신정마을
영광읍에서 광주로 운행하는 군내버스 500번을 타고 22번 국도를 따라 10분쯤 가다보면 도로변에 세워진 진천마을 표지판이 나타나고 거기서 좀더 가면 멀리 신정과 구동마을이 있음을 알리는 하나의 이정표인 묘량교회가 보인다.

이 교회를 지나 1km 가량 쭉 가면 양쪽에 두 마을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른쪽에 당산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한 마을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신정마을이다. 신정마을에 도착해서 왔던 곳으로 눈을 돌리면 이곳 사람들에게 몇백년째 식량을 제공하고 있는 신정앞터들이 보이고 계속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중봉산 매봉산 그리고 옥녀봉이 눈에 들어온다.

신정마을은 이 마을 서남쪽에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팽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것이 정자나무 숲을 이루었다는 뜻의 정(亭)과 구동(舊洞)에서 나뉘어져 새롭게 생겼다는 뜻의 신(新)이 합해져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전(선조 15년) 김해김씨 사람인 김청호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 마을에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이루게 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처음부터 지금의 신정마을에 김해김씨가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지금 묘량교회가 있던 자리 즉 구기촌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오다가 그 이후 지금의 신정마을로 옮겨와 살아오고 있다고 한다. 이 신정마을이 처음 형성된 곳은 지금보다 약간 위쪽인 곳에 있었으나 그 뒤에 조금 아래쪽인 바로 현재의 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들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지금가지 동족부락을 이루고 살아오고 있으며 지금도 이 마을은 다른 곳에서 이 마을로 시집온 사람들의 성씨를 제외하고는 성씨가 거의 변함없다고 한다.

자료제공 : 영광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