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탐방을 다녀와서 ②
진시황릉의 무덤속을 들어가 볼 차례다. 황릉에서 몇 킬로 털어진 곳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로 진시황의 병마용갱을 구경할 수 있었다. 현재 발굴한 갱의 숫자는 4개로 1973년 마을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됐단다. 병마용갱을 들어가기 전 병마용갱이 만들어진 과정을 만든 영화를 관람했다.
세계적 유물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만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입구 한켠에선 진시황의 병마용갱을 최초로 발견한 할아버지 두분이 볼펜을 들고 열심히 사인을 해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4개의 갱만으로도 세계인들에게 천문학적인 관광수입을 벌고 있지만 더 이상의 진시황릉속 유물들을 개발하지 않는 것이 중국정부의 입장이다.
그것은 찬란한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고 후손들이 더 좋은 문화재 개발 방법과 노하우를 축적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선조들의 문화유적을 보존하고자 하는 중국 지도자들의 깨어있는 자세가 무자비한 문화재 개발과 무방비한 문화재 관리를 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 같다.
죽어서도 권력과 재물을 안고 가는 황제
1호갱, 2호갱, 4호갱을 들어가 보면 어쩜 그렇게 군인들은 군인답게, 문무백관들은 문무백관답게 그 표정 그 모습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인간보다도 건장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양릉과 달리 병마용들의 신장도 그 당시 표준체중으로 만들어져 있어 금방이라도 뚜벅뚜벅 걸어나올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황제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권력과 재물을 무덤속까지 끌고 가는 것이 자신의 재위기간동안 엄청난 규모의 봉분을 쌓으며 많은 세제를 쏟아 부었을 것이니 민초들과 하층민들은 얼마나 궁핍한 생활과 희생을 했겠는가! 하지만 그 지하궁전을 건설했기에 후손들은 그 유산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해주니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늘도 중국의 하루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안식처로 가기 위해선 2시간을 달려야 했다. 노곤한 몸을 기대고 차창 밖을 보니 아직 서안주변의 도시들은 도시화가 덜 된 곳인지 높은 아파트는 보이지 않고 흙집 담벼락과 지붕은 그대로 납작했다. 가이드 말을 들으니 지붕위에 아들 딸들이 장가를 가 2층에 살고 손자 손녀가 장가를 가 3층에 사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소박하고 순수한 중국인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부흥도 부익부 빈익빈은 아닌지…
요리집에서 중국요리를 맛있게 먹고 우리 일행들은 발마사지를 받기위해 간단하게 씻고 발마사지 상점으로 향했다.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해주는 아가씨를 보니 아직 16세 소녀처럼 보여 조금은 안쓰러웠다. 한창 학교다닐 시기에 돈벌이에 나선 소녀를 보니 중국의 부흥도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가뿐하게 하루를 열고 도덕경으로 유명한 노자를 모신 사당 누관대와 건릉을 구경할 차례다.
종남산을 이불삼아 남쪽 꼭대기에서 도덕경을 저술했다고 해 누관대라 이름지었고 지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삼국시대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여기에 머물렀고 신라시대 유학생들과 일본유학생도 많았다고 한다. 누관대를 올라가는 길은 그야말로 말똥냄새로 가득했고 주위의 집들은 말 그대로 칙간이 어디고 방이 어디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아주 누추한 살림살이였다.
중국여행 잘못하면 바가지 상흔 당해
음료수를 파는 노점상인들도 있었는데 여담으로 음료수 두병을 2달러에 샀는데 가이드가 다시 가서 너무 비싸니 1달러만 받으라고 했단다. 하지만 한사코 여행객이 한번 줬으니 절대 안된다고 해 끝내 가이드가 지고 말았다. 그처럼 중국인들은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은 절대 내놓지 않는다고 했고 이방인들에겐 몇배의 이윤을 붙여 판다고 했다. 그 심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제 당나라의 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나러 가보자. 건릉은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드러누운 형상으로 산 전체가 봉분이라고 한다. 측천무후는 본래 당태종의 후궁이었으나 그의 아들 고종이 연모해 당태종 사후 고종의 비로 들였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희귀한 병에 걸려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자 나랏일의 실권을 쥐고 고종이 죽은 후에도 섭정정치를 한 중국의 대표적 여걸이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그 당시 신하들과 무사들이 건릉을 지키고 있었는데 마치 생존해 있는 사람들처럼 인자하고 박식할 것 같은 문관들, 근엄하고 비범함을 엿볼 수 있는 무관들이 건릉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지켜주고 있었다. 또한 몇 미터를 걸어나와 보니 건릉박물관과 중국의 영태공주의 묘를 볼 수 있었다.
영태공주묘의 지하토굴 속에는 공주가 부리던 나인들, 생활용품들이 그대로 소장돼 있었고 벽에는 그 시대의 의식주에 관한 풍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벽화가 있었다. 공주의 관은 석관이었는데 과연 그 뚜껑을 열면 아름다운 공주가 나풀거리며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음호 계속
저작권자 © 영광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