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의원의 국감소회
10월22일 금요일 밤. 무교동 고깃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홀가분하고 유쾌했다. 오랜만에 해방감을 즐겼다. 이유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정치권 바깥의 스스럼없는 선후배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3주일 동안의 국정감사를 막 끝낸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낀 데는 두번째 이유가 더 컸다.국감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3주일 동안 언론과 시민단체의 평가를 받으며 지냈다. 거의 매일 새벽 2~3시까지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다음날 국감자료를 정리하고, 오전 9시20분경까지 국감장에 도착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나는 두개의 상임위원회에 속해 있다. 본업은 건설교통위원회지만, 원내대표로서 운영위원회에도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건교위에는 26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상임위 가운데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국감 기간 동안 의원들의 출석률이 무려 99.7%나 됐다.
건교위는 5무(無)위원회다. 다섯종류의 국회의원이 없다. 전국구, 여성, 민주노동당, 서울 출신, 제주 출신 의원이 없다. 건설교통 업무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의원들이 없는 셈일까. 그래도 대단히 다양하고 재미있다.
건교위 국감은 행정수도 이전으로 시작해서 행정수도 이전으로 끝났다. 행정수도 이전의 주무부서가 건교부이기 때문이지만, 일정도 꼭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조치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계속되고 있을 때 국감이 시작됐고, 헌재의 위헌 결정이 발표된 다음날에 국감이 끝났다.
그러나 국감이 행정수도 이전만을 다룬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관심사를 거론하고 따졌다. 특히 나는 여야 정당의 정치적 공방에서 한발짝 비켜서서,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문제들에 더 많이 집중했다고 자부한다.
새로 도입된 첨단 교통시설 KTX의 빛과 그림자, 호남선 전라선의 균형없는 낙후와 문제점, 주택보급률은 101.2%로 높아졌는데도 자가보유율은 49.7%로 떨어진 주택정책의 허실과 서민들의 주택난, 인천국제공항 등의 테러 대비태세 등등이 내가 다룬 주요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많은 언론들이 다뤄 주고, NGO 국감 모니터단이 나를 우수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 뽑아준 것은 과분할 따름이다.
열정만으로 이뤄지지 않는 개혁·협의 합의 이끌어내는 기량이 개혁적 결과 도출
나에게는 다섯번째 국감이었다. 늘 그렇지만, 이번 국감도 나에게 많은 소득과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소득은 크게 봐서 세가지였다.
첫째는 꽤 많은 잘못이나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주택공급을 계속 늘리면서 그것이 서민들의 내집 마련에 도움이 되도록 무주택 서민 보호장치를 되살리겠다, KTX 요금체계를 노선별 요일별 시간대별로 차등화하는 방향으로 개선하고 호남선 요금을 내리겠다, 고속도로 휴게소가 폐기물을 철저히 분리배출하도록 지도단속을 강화하겠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단계적으로 확·포장하겠다’는 등의 답변이 그것이었다.
건교위 전체의 소득은 훨씬 더 많았다. 특히 산하기관의 인사난맥이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동료 의원들의 지적은 강렬했다. 이에 대해 건교부도 확답은 못했지만 문제의 소재는 충분히 알게 된 듯했다.
둘째의 소득은 건교위 소관업무를 많이 알게 된 것이다. 자기 국감을 준비하고, 피감기관과 문답하는 과정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에 못지않게, 동료 의원들의 국감 과정을 듣고 있노라면, 자기가 몰랐던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된다. 각 기관의 업무와 문제점, 과제와 지향, 구성원들의 대체적인 성향까지 파악하게 됐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피감기관장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같다. 강동석 건교부장관도 사석에서 "저도 알지 못했던 것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피감기관 출입기자들까지도 "국감을 취재하면 1년치 취재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셋째의 소득은 동료의원들을 알게 된 것이다. 총선거를 통해 국회가 새로 구성되면 모르는 의원이 많아진다. 17대 국회는 초선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나도 이번에 건교위 소속의원들을 상당히 깊숙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강한 사투리를 쓰는 두 의원에게 나는 각별한 친근감을 느꼈다. 어떤 호남출신 의원은 “이것이요 잉, 거 멋이냐, 거시기…”해서 나를 웃게 만들었다. 어떤 영남출신 의원은 중모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건설고통부가…” “건고부는…”이라고 말했다가 자신의 발음이 이상하다는 것을 너무 의식했는지, 다음에는 “견교부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소득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첫째는 의원 1인당 발언시간이 너무 짧다는 점이다. 깊이 있는 추궁이나 토론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보완해야 한다. 상시국감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둘째의 아쉬움은 일부 의원들의 자세가 완전히 좋아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 연설만 하고 상대의 답변은 막아버리는 경우, 모욕적 표현이나 반말을 하는 경우 등등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언론의 집중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가 없어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의원들이 자계(自戒)하고 또 자계해야 한다.
셋째의 아쉬움은 피감기관들의 태도 또한 썩 좋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부 피감기관장이 소관업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 이 말에도 “검토하겠습니다”, 저 말에도 “검토하겠습니다”하고 소신없이 답변하는 경우, 의원들이 뻔히 알고 있는데도 기관의 문제점을 필요 이상으로 방어하는 경우 등등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특히 산하기관들에 대한 낙하산 인사가 뿌리 뽑히지 않으면 산하기관의 경영개선도, 구성원들의 도덕적 긴장도 어려울 것 같았다. 2004년 국감은 끝났다. 이제 본회의 대표연설과 분야별 대정부질문, 각종 법안과 새해 예산안 심의, 국가보안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둘러싼 첨예한 싸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어질 것이다.
이른바 4대 개혁입법도 마찬가지다. 여야가 협의해 최대한의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국민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법안일수록 여야합의로 처리해야 한다. 내용에 합의하지 못하면 표결한다는 합의라도 해야 한다.
개혁은 열정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것을 정부 여당이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기회 닿는 대로 이 말을 되풀이할 작정이다.
2004년 10월24일
이낙연<민주당 원내대표>
저작권자 © 영광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