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내고향 영광 법성 / 강춘권<법성포민속연보존회 사무국장>
고향에 가면 유난히도 자주 귀에 들어오는 기분 좋은 소리가 있다. ‘우리 법성!’ 특히 몇몇의 청년들이 모인 자리면 어김없이 ‘우리 법성’이라는 수식어가 튀어나오는데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고향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자긍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고향 법성포는 서해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어느 지역에도 뒤지지 않을 기개와 부지런함이 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 선·후배들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때 배움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은 두번 하지 않게 일 처리를 해 내던 다부지고 영리한 청년들을 많이 보아왔다.
법성포는 옛날부터 수로가 잘 발달돼 가까운 중국과 거래가 활발했고, 고려조에는 국가의 중추기관인 조창이 설치된 곳이다. 이후 조선조 중종 7년에는 무려 28개 지역의 군현을 다스리는 조창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정조 13년에 군사기지인 수군(水軍)을 독진(獨鎭)으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고 영광군수의 관할 밖에서 일반행정까지 집행하게 됐으니 거창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그 위세가 대단했다 한다.
따라서 조곡을 납부할 시기가 되면 난장이 들어서고 힘깨나 쓰는 장사들이며, 상술에 능한 보부상들이 모여들었을 것은 당연한 일, 이때 자연스럽게 눌러 앉아 살게된 사람들이 지금 법성포 사람들의 선조가 된 셈이다.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그리고 법성 사람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부심, 어디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당당한 기개, 고향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거리가 북적일 정도로 경향각지에서 모여드는 향우들의 단결력을 보면서 역사에 근거한 법성포의 발자취와 대입시켜 본 것이지만 어찌 그것만으로 오늘의 법성포가 있었겠는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선친들의 덕이기도 하겠지만 이 지역 특산품인 굴비가 있고 모든 법성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 법성’이라는 애향심 그리고 자긍심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주말이면 고향 갈 생각에 마음 설레며 밤잠 설치는 때가 적지 않지만 마음 한구석을 씁쓸하게 만드는 아쉬움 또한 많은 고향이다.
고향을 살찌우게 만드는 천혜의 보물 ‘법성포굴비’를 두고 양분된 특품사업단과 굴비보존회의 불합리, 강릉단오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법성포단오제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무관심, 고향 일에 서로 머리 맞대고 고민 나눌 때 외면하던 사람들이 훗날 왈가왈부하며 지역의 갈등을 부추기는 병폐는 하루빨리 고쳐 나가야 할 하나의 과제이다.
목포 부산 인천 등 어디에서든 조기만 있으면 우리 고유의 특산품인 법성포 굴비로 둔갑해 시장에 나돌고, 관광객들은 굴비고장인 법성포의 상가를 기웃거리며 “진짜 굴비 맞아요”라며 의구심을 드러내는 현상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선배들이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 법성포단오제 또한 소홀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일부 주민들 사이에 우리에게 득된 게 무엇이냐고 불만들을 토로하지만 단오제 행사를 통해 전국에 굴비라는 특산품이 확실하게 홍보됐고 전체 매출액이 급신장한 것은 인정해 줘야 한다.
물론 전통문화의 행사를 가지고 지역의 소득증대에 잣대를 대는 것 자체가 모순일진 모르나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서 치르는 큰 행사인 만큼 지역에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전체 주민의 참여를 유도해 낸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완공되고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걸레바탕’이 매립공사로 위용을 드러낼 때면 서해안 일주도로와 연계한 중요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청사진을 그리며 굴비의 의존도에서 벗어나 제2의 중흥기를 맞을 수 있도록 모두가 ‘우리 법성’이라는 구호를 외쳐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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