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정선 / 수화통역사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그 이유중에 하나는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교육을 받고, 정보를 교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의 경우 건청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상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집안의 대소사나 취업에 관련된 사항, 종교적인 문제 등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대화가 안돼 답답한 마음을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교통사고 등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몸이 아파 급히 병원에 가야할 일이 생겨도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본의 아닌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청각장애인들의 이런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겠다는 작은 소망으로 수화통역을 시작하게 됐고 2002년 3월 영광군청 민원실에 장애인 전용민원창구가 개설되면서 본격적인 수화통역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화통역은 나의 소망이 아닌 청각장애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건임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청각장애인에게 교통사고가 났다거나, 경찰서에 피의자가 돼 검거가 되는 경우가 생기면 수화통역사는 밤낮을 불구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피의자가 되기도 해 청각장애인을 대변해 줘야 한다. 2003년 추석으로 기억된다. 추석날 밤에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만에 즐거운 명절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절도범으로 청각장애인이 검거돼 왔으니 통역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명절의 기분은 뒤로 한채 경찰서로 달려가 새벽2시까지 피의자가 돼 청각장애인의 역할을 대변한 한 적이 있다. 또 얼마전에는 서울에 있는 동생가족이 내려와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청각장애인인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의사소통이 안돼 진료에 어려움이 있으니 급히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가족여행은 포기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가 끝나고 검사결과를 본 후 약국에서 약까지 처방해 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과거에는 청각장애인들은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이유로 몸이 아파도 참고 병원에 가지 않아 병이 더욱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수화통역사가 접수부터 진료과정 검사 처방까지 통역을 해주고 있어 청각장애인들도 좀더 편리하게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청각장애인들이 운전면허를 따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마찬가지여서 시험에 응시할 생각도 못하고 무면허로 운전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수화통역으로 시험문제를 풀어주므로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돼 다행히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면허증을 소지할 수 있게 됐다.
최근 청각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 병원이나 교회, 학교에서도 수화를 배우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여러 곳에서 수화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중 영광대교회 청년회원들과 영산성지고 학생들이 전남 농아인협회 주관으로 개최된 수화경연대회에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대상 및 우수상을 수상해 총 상금70만원 전액을 청각장애인을 위한 후원금으로 기탁해 수화통역사로서의 보람을 더해 줬다.
이처럼 수화통역사는 청각장애인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하는 해결사이자 위기상황에는 언제든 출동하는 119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광군에 따르면 등록된 청각장애인은 316명이고 그중 수화통역이 꼭 필요한 중증장애인은 179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동안 움츠려 있던 청각장애인들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 수화통역 건수도 날로 증가 하고 있다. 실제로 2003년 381건이던 것이 2004년 737건으로 증가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하지만 영광에는 다른 수화통역사가 없어 통역이 필요한 모든 청각장애인들에게 통역을 해드리기란 역부족이 아닐 수 없다. 위급한 일로 수화통역을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곳에서 다급하게 연락이 오면 나중에 연락이 온 곳에는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무척 안타깝다.
청각장애인도 우리사회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구성원으로서 의사를 주고받고 정보를 알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이는 청각장애인 개인이 아닌 우리 사회나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지역에 하루 빨리 많은 수화통역사가 배출되고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청각장애인들이 언제 어디서든 불편을 겪지 않고 자신의 장애를 잊고 마음 편히 생활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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