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다되신 아영 할매의 소망
일흔 다되신 아영 할매의 소망
  • 영광21
  • 승인 2005.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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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21 시론 - 정금안 / 영광여성의전화 집행위원장
요즘 만나는 사람 모두들 살맛이 안난다고 한다. 끝날 줄 모르는 기나긴 경제불황과 한번씩 터졌다 하면 크나큰 참극으로 다가오는 자연 재해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오그라들고 어깨가 웅크려지는 건 비단 겨울 추위 탓만은 아닐 터이다.

유난히도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은 훌훌 털어 버리고 올해엔 따스하고 살맛 나는 세상을 소망하다보니 아영할매의 새해소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며칠전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자마자 “나 아영이 할맨디이∼ 어이! 나 좀 도와주랑께!”라는 소리가 전화선을 탄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뭣이긴 뭐여! 내 까막눈 뜨게 해 주랑께. 매칠을 생각허다 체면 불구허고 전화했네이! 올해는 안 넘기고 잡은디이~ 나 좀 어뜨케 뜨게 해주소~”
“알겠습니다. 제가 이것저것 알아보고 찾아뵐께요” “나는 하루가 급혀! 한시라도 빠르면 조응께로 빨리 좀 갈쳐 주소~ 부탁혀!”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조급해 하는 할매의 모습을 떠올리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일흔이 다된 연세인데도 한글을 깨치고 나서야, 죽더라도 눈을 감고 죽겠다고 하시던 그 할매. 작년 여성의전화와 여성문화연구소가 우리마을에서 벌였던 <농촌여성문화축제> 도우미로 참여했던 할매인데 그때부터 한글공부를 하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보이셨었다.

여성의전화에서 하고 있는 마을여성공부방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셨나보다. 그 당시엔 바쁜 일들이 많아 겨울 농한기때 생각해 보자고 밀어두었는데 할매는 그 일을 잊지 않고 가끔 길에서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꺼내시곤 하셨다. 인원이 최소한 서너 명은 돼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곧 죽을 나이에 글 배워서 뭐에 써먹을 거냐”며 되레 무안을 준다며 씁쓸해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풍족한 집에서 자라나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아들들은 전부 고등교육까지 시키신 친정아버지가 딸년 머리에 먹물 들어가면 시집가서 사네 안사네 친정 욕 먹인다며 공부를 못하게 해 까막눈이 됐다며 여자로 태어난 게 죄라고 한탄하시던 아영이 할매. 공부에 한이 맺혀 자식들 학교 다닐 때 어깨너머로 라도 배우고 싶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허덕이느라 지금의 나이까지 오고 말았다며 지금이라도 열심히 배워 멀리 사는 자식들에게 내 손으로 쓴 편지 한장 보내고 나면 한이 풀릴 것 같다는 할매.

아무래도 올해엔 할매의 그 맺힌 한을 풀어드려야 할 것 같다. 밤중에라도 짬을 내어 글을 가르쳐 달라고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그 귀여운(?) 모습에 감동해 버렸다.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 아영할매가 2005년을 신나고 즐겁게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사실 살맛나고 신나는 세상이란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아영이네 할매처럼 평생을 간직하고 있던 자신만의 한을 꿈으로 승화시켜 과감하게 도전하는 삶, 그리고 여력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서로 나눌 수 있는 여유롭고 따스한 세상,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세상과 내가 하나로 살아가는 공동체적 생활이 되살아나는 농촌마을이 되길 소원한다. 2005년 연말엔 정말 살맛나는 한해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한해가 내게도, 아영할매에게도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