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만세시위 진두지휘 최후까지 독립운동 투신
고송 고경진( 松 高暻鎭) 선생은 법성면 진내리 362번지에서 파총(把摠 : 각 군영의 종4품 벼슬) 고시은(高時恩)의 아들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과묵하였으며 개성이 투철했다. 남다르게 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경서를 읽어 군자의 도를 지키었다.
선생의 나이 열아홉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압(늑약)으로 체결돼 국운이 기울게 되자 조병세 민영환 등 13도 유생(儒生)들이 조약철회 상소를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이 자결을 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해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피를 흘리게 되자, 크게 자극을 받은 선생은 구국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했다.
1907년 을사보호늑약이 체결된 2년후에 법성 이장섭(李長燮), 이택섭(李澤燮)이 법성포(전 조창자리)에다 법성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서 최한규(崔漢圭) 선생을 교사로 초빙해 왔다. 선생은 최한규 선생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됐는데 최 선생의 인도가 있어 웅지(雄志)를 품고 멀리 고향을 떠나 평양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며 뜻을 길렀다.
1913년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법성학교 교단에 섰는데 학생들에게 배일사상과 독립에 대한 정신교육을 철저히 했고, 민중에게 그 운동을 펴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1919년 기미 3·1독립만세 사건이 발발하자 영광 위계후(魏啓厚)선생과 손을 잡고 법성만세시위를 최선봉에서 진두지휘 함으로써 그의 항일투쟁은 노골화돼 본격적인 일경의 감시는 물론 투옥하는 등 심한 탄압을 받게 돼 교단에 더 이상 설 수 없게 되자 1920년 학교를 떠났고 구국을 위해 선생은 생명과 재산 등 모든 것을 바치기로 더욱 마음을 굳혔다.
선생은 “애국이란 나라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것이며 돈보다 귀한 것은 목적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직을 떠난 뒤 선생은 집안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동지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정에 조달하기 위해서 상해를 드나들었다. 그러는 동안 왜경의 감시와 탄압은 날로 심하여졌고, 가산이 탕진될 대로 돼 법성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1936년 불갑면 녹산리로 가족을 옮기게 했으나 왜경의 감시로 집에 드나들 수 없어 식구들은 그이를 잊어야 했고, 그 역시 가사는 물론 처자식까지도 머리에서 지워야 하는 아픔을 이겨야만 했다.
선생은 나라를 위해서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자신의 구국이념을 다지면서 최후 일각까지 독립전선에서 투신하다가 지쳐 병든 몸으로 동지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기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에서 그의 집이 토담집인지 부인의 주름살이 늘었는지 아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조차도 모르는 채 1942년 55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생을 구국의 일념으로 일관한 선생의 일대기를 듣노라면 자연 마음이 숙연해지고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선생의 호는 고송( 松), 관은 고흥인이다.
조남식 원장<영광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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