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보통학교 생도들 거사로 불붙은 수차의 만세시위 전개
(4) 순사부장 근등용의 범인체포고발에 따르면 영광보통학교 생도 등이 이병영의 숙소에서 약간 수상한 거동이 보이기에 사찰하였던 바 대정 8년 영광내 교촌리 방향에서 다수인이 모여 일제히 '대한독립만세'하고 고창하였다. 순사와 순사보 5명이 같이 현장에 나가 보았더니 읍내 도동리의 남단(南端)으로부터 남천리 조희경(曺喜暻)의 정미소 앞 도로에서 종이로 만든 구한국 국기를 손에 들고 영광보통학교 생도 123명과 기타의 자와 합하여 약 300명이 읍내를 향하여 행진해 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를 제지하려고 하자 정헌모와 허 봉은 선두에 서서 타생도를 선동하였고 훈도 이병영은 생도들 가운데에 서서 제지하지 않고 도리어 인솔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영광보통학교장은 부근 민가에 피해 있으면서 순사와 순사보에게 명하여 정헌모 허 봉 이병영 등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5) 사법경찰관의 학교장에 대한 신문조서 중 "나는 보통하교 교장으로써 동교 훈도 이병영의 거동을 수상쩍게 보던 차에(…중략) 대정 8년 3월14일 영광보통학교 정구장에 학생들이 집합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만세를 일제히 불렀으나 형식으로만 제지하였을 뿐 기를 들고 교외로 내달렸으나 방치하였다.
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으나 이훈도는 길가에서 방관하였다. 수기(手旗) 하나 빼앗은 일없고 설유 한마디하지 않았다."
(6) 원심공판 때 피고 정헌모의 시말서 중 “이 선생은 금월 10일 나의 교실에 들려 조선인은 독립을 해야 하며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너희도 그 방면의 공부를 하라.”
"조선인은 독립능력 있어"
(7) 허봉도 시말서에서 “금년 3월12일 밤 이 선생의 집에 갔더니 '이 선생은 각 지방에서 지금 만세운동이 한창인데 너희도 준비하고 있느냐'라고 질문당한 일이 있다”라고 하였다.
(8) 피고 이병영은 "나는 영광보통학교에 봉직 중 금년 3월10일 3년생 급장 정헌모를 교실로 불러 동인(同人)의 의향을 물었더니 동인은 소요를 위해 적극 준비중"이라고 하기에 무슨 이유냐고 물었더니 동인은 "우리들 조선인은 대단히 속박을 당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독립을 찾는 것"이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중략) 나도 조선인이고 그들의 열성을 헤아릴 것 같아 크게 제지하지 않았고 단 “너희가 속박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길은 소요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타일렀다. 금년 3월12일 밤에는 2년생 허 봉이 우리 집에 놀러 왔기에 어찌하여 독립운동을 하느냐”고 물은 일은 있는데 그때도 전심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이상과 같은 재판기록이 말하듯이 3월14일 발생한 영광 제1차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위계후 고경진 양지도자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내려온 조철현이 영광보통하교 훈도 이병영과의 합작으로 주도됐다.
여기에서 학생대표로 활약하였던 인물은 정헌모, 허 봉, 조술현이었다. 그들은 당시 학교였던 영광향교의 명륜당을 출발 도동리 남단(옛 군내버스정류장)을 돌아 경찰서로 향하던 중 경찰과 충돌하였던 곳은 남천리 조씨(曺氏)의 정미소 앞(구 강남예식장 앞)이었다.
군청 경찰서 휩쓴 시위군중
그러나 학생 150명과 시민이 합세한 노도와 같은 시위대의 행진을 가로막기에는 충돌한 일본 경찰의 힘이 너무도 빈약했다. 순식간에 군청과 경찰서에 쇄도한 피 끓는 젊은 학생과 분노한 시민들은 잔악무도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연호했다.
그러하기를 몇 시간이나 계속하였을까. 주동교사와 대표학생은 모두 현장에서 무장한 왜경에게 체포당함으로써 오후 5시에 자진 해산했다.
3월14일 영광보통학교의 생도들이 벌인 영광 제1차 만세시위는 훈도 이병영과 주동학생 3명 조철현 등을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영광경찰서에 구금함으로써 일단 해산됐다.
그러나 그날 밤의 영광읍은 평온한 듯한 외면과는 달리 가일층의 거사가 비밀리에 잉태되고 있었다. 영광보교의 선배들은 후배들의 거사에 크게 자극을 받았고 어린 생도들이 수감당했다는 사실에 모든 학부형들은 심한 격분을 했다.
이 15일에 벌어진 제2차 만세시위를 주모하였던 인물은 김은환 정인영을 비롯해 조희방 조병문 박정순 서순채 유두엽 김준헌 등이었다. 이중 뒷 3인은 일단 피했다가 동월 27일 3차 시위를 꾀하게 된다. 그러한 이유로 3차때 구금당한 3인은 일본형법 제55조(공동정범)의 적용을 받아 같은 법정에 서게 됐다. 여기에 공소심 판결문 중 2차분만을 기술한다.
(1) 피고 김은환 정인영 조희방 조병현 박병문 박정순 등은 영광군 영광읍 남천리 박정환의 직포공장에서 회합해 조선독립의 희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다수의 조선인이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할 것을 모의해 그 실행방법으로써 한국태극기 수십본을 제작 준비해 동일 오후 1시경 동 공장앞에서 조선인의 군중에서 유포했고 그들 수백명은 다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해 동읍 남천리, 백학리, 무령리를 경유해 영광경찰서에 쇄도했고 피고 서순채 김준헌 유두엽 등은 상기 진행 도중에 합세해 더욱 더 격렬히 했다.
(2) 피고 김준헌은 대정8년 3월15일 오후 1시경 조선독립 시위운동의 집단에 참가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영광경찰서까지 갔는데 그때 자기는 자신의 권유에 따라 참가한 정인영이 당일 집합장소인 직포공장에 동지 수명과 합동해 그 운동의 협의를 했고 자기는 합병 당시부터 조선독립의 사상을 가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공술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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