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기록을 통해 본 영광 3·1운동 ③
재판기록을 통해 본 영광 3·1운동 ③
  • 영광21
  • 승인 2005.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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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항일 독립만세운동 군대동원해 무자비한 진압
(3) 피고 정인영은 동일 조조(早朝)에 전기(前記) 직포공장에서 동지와 회합해 동일 운동의 방법 등을 모의해 동일 오후 1시경 영광읍내에서 일어난 조선독립 시위운동의 집단에 참가해 구한국 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영광경찰서 앞까지 행진한 사실이 있었다고 진술

(4) 피고 조희방은 동일 영광면 남천리에서 조선독립운동이 있었을 때 그 집단에 참가해 구한국 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른 사실이 있다고 진술

(5) 피고 김준헌, 정인영의 각 공술중 동월동일 양 피고는 조병현 등 약 10여명이 박정환의 직포공장에 모여 구한국 국기를 제작해 동 지방을 약 500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6) 피고 정인영은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만나서 김은환 조병현 조희방과 통모했다.
(7) 피고 조희방의 공술에 의하면 상기 김은환의 공술과 같이 회합이나 행진 등에 관해 모의했다.

(8) 피고 박병문과 서순채의 공술에 의하면 동일 다중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행진에 참가했다고 진술

(9) 피고 김준헌의 공술에 따르면 당일 경찰서 앞에서 군중들이 가세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고 진술

400여명 군청 경찰서까지 쇄도
(10) 피고 김준헌은 공술에서 자기는 당일 조희방에게 말하기를 “어제는 보통학교 생도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으니까 오늘은 졸업생 우리들이 하자”라고 하자 승낙했고 박정환의 직포공장에 가니 그곳에서는 조병현 박병문외 2명이 기(旗)를 만드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진술

(11) 피고 조희방의 공술중 당일 김은환은 말하기를 “어제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해 상담할 일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기에 박정환의 직포공장에 갔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보통학교의 선생이 구류를 당하고 있으니 시위운동으로써 그들을 타취하자”라고 했다.

(12) 영광경찰서 순사부장의 체포고발서에 의하면 당일 정오에 전일의 소요보다 몇배의 다중과 보통학교 생도 졸업생 기타 읍내 양인 약 400명이 광기와 같이 만세를 연호하며 영광군청과 영광경찰서에 쇄도했고 그때 피고 박병문 정인영 김은환 조희방은 최선봉에 서고 서순채 김준헌은 그 뒤에서 군중을 향해 만세를 선창했다. 주먹을 쥐고 모자를 흔들며 군중을 선동함으로써 그들이 경찰서나 군에까지 들어가게 했다.

(13) 경찰서의 신문조서중 동일 오후 1시경 영광 남문 밖에서 김은환 등이 벌이고 있는 소요를 목격하고 있던 유두엽은 거기에 합세 군중을 선동했다.

(14) 사법경찰관 전중륭남(田中隆男)의 공술에 의하면 동일 오후 1시경 전술 지방에서 조선인 학생 및 청년들이 대오를 지어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할 때 박정순은 본인의 인력거를 타고 대열의 선두에 나서 기를 흔들며 큰 소리를 외쳐댔다.

(15) 피고 박병문은 동일 오후 1시경 박정환의 직포공장 사무소앞에서 다중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있기에 자기도 같이 합창했는데 자기는 남들보다 한층 더 즐거운 기분으로 크게 외치며 남들을 격려했다.

교사 학생 구속에 시위참가 확산
(16) 피고 서순채는 독일 구한국 국기를 들고 한국독립만세를 부르며 오후 1시경 남문밖으로 부터 시작해 영광경찰서 앞에 이르는 도로에서 참가했다. 당일 아침 박정환의 직포공장으로 집합하자는 사실을 김은환으로부터 들었기에 기2본(旗2本)을 가지고 갔으나 이미 시위행렬이 떠난 뒤여서 중도에서 합세했다 라고 진술

이상의 기록들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연상해 보면 피비릿내 나는 현장이 보이는 듯 하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독립만세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 2차 시위를 주도하였던 김은환은 진즉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한 30대 청년이었다. 그들은 전일에 10대 후배들의 거사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모교의 교사와 후배들의 구속에 가일층 분노를 느꼈다.

그 충격, 그 분노는 전체 영광인을 한데 묶는 끈이 돼 줬을 뿐 아니라 단말마적 일군의 발포는 끓어오르는 민족의 울분에 불을 당겼다. 이로서 영광인들은 활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처럼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쳐 그동안 쌓이고 쌓인 민족의 한을 마음껏 발산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일본의 군경은 노도처럼 쇄도하는 500여 군중들을 마구차고 때리며 구금하는 한편 찌르고 쏘며 살상도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이 시위를 주도했던 이 고장의 지도자들은 약 20일후인 5월6일 목포지원에서 체형을 받았다.

당일 현장에는 군대까지 동원됐고 많은 사상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단순한 통계일 뿐 소상한 자료가 없다. 2차 시위를 주도했던 지도자들의 형량은 ▶ 김은환 징역2년(공소심 형량 동일) ▶ 정인영 징역2년(〃) ▶ 조희방 징역1년6월(〃) ▶ 조병현 징역1년6월(〃) ▶ 박병문 징역1년6월(〃) ▶ 박정순 징역1년6월(〃)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