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기록을 통해 본 영광3·1운동 ⑤
재판기록을 통해 본 영광3·1운동 ⑤
  • 영광21
  • 승인 200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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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포 만세시위 당일 모두 체포
고경진 광복위해 해외 사관학교 지망
그러나 차질없이 진행된 법성포의 만세시위는 드디어 그날이 왔다. 미리 정해진 장소로 모여들던 주동학생들은 일경의 간악한 마수에 모조리 체포당하고야 말았다.(한국독립운동사 권2. p312, 833)

그러나 의리의 소년 박명서는 시종 “배후에는 아무도 없으며 주모자는 오직 자기자신 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대구이심법원 판결문중 해당부분만을 번역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피고 박명서는 조선은 독립국이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 운동방법으로서 다중이 공동으로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시도하여 대정(大正) 8년 3월31일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보통학교에서 동교 교사 나계형에 대해

'우리 고장에서도 생도 전부를 참가시키겠다'는 뜻을 밝히고 동교생도 약 10명에 대해 전시(前示)운동에 참가해야 한다는 뜻을 고해 동인 등을 선동함으로서 공공의 안녕질서를 방해했다.

(2) 영광경찰서 신문조서중에서 피고 박명서는 자기 스스로 주모자가 돼 타인을 선동했고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보통학교 생도를 선동하려는 계획으로 3월25일 한차례, 동 26일 두차례 학교에 갔는데 두 번째 갔을 때에는 동교 나 교사에 대해

“나는 조선독립운동을 계획해 생도들에게 권유하고 있으나 그 학생들이 경찰에 구금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자기가 책임을 지고 그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했으며 학교운동장에서 약 10명의 생도들에게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진술.

법성포보통학교 나계형 교사와 학생
(3) 증인 남관염(南官焰)에 대한 법성경찰주재소에서 한 신문조서 중 "나는 3월 모일 박명서가 학교에 와서 나계형 선생에게 독립운동을 권하고 또 그러한 목적으로 생도 10명만 보내달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진술.

(4) 동주재소에서 나계형에 대한 신문조서중 3월31일 박명서가 학교에 와서 나에게 하는 말이 “요사이 각처 학교에서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고장에서는 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전원이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명령해 주시오”라고 애원하기에 "나는 응낙했다"라고 진술.

이상에서와 같은 일관된 박명서 학생의 신념과 주장은 효과가 있었다. 체포 구금당했던 동지들은 대부분 방면이 되고 자신을 합해 유영태, 최복섭 3인만이 징역 4월의 형을 받았다.

여기서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공범인 최, 유 두사람의 사법문건이다. 총무처의 정부기록보존소에는 박명서의 판결문이 보존돼 있었고 남은 두 사람은 법성면사무소의 수형자명단에 기록돼 있을 뿐이다.

영광사람 타지역 활동 진상
영광에서 3·1운동의 만세시위가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즈음에 외지에서도 영광인들은 도처에서 같은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판기록의 보전으로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부분만 차례로 소개한다.

(1) 서울에서의 위계후와 고경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분노의 질곡에서 신음하던 암흑기에 이 고장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있었으니 위계후와 고경진이었다.

두 분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위 선생이 3년 연상) 다같이 신문학을 전수했으며 국가의 운명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애국자였다. 그러나 두사람의 상이점도 있었으니 위 선생은 원래 선비가문의 출신이라 문인기질의 인품이었음에 대해 고 선생은 무반가통(武班家統)을 지녔다.

임란의병장 고경명의 후예요, 선친 역시 법성 조선단(漕船團)의 파총(把摠)이라는 군직에 있었다. 그러한 연유에서 두 분의 항일투쟁도 그 방법을 달리했음을 보게 된다.
위 선생이 영광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14년 나이 30세때에 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그후 영광사람 조 운의 누이 조영정을 아내로 하고 영광사람을 자부(남궁현)의 누이로 맞아 들이면서 영광이 제2고향이 됐다. 위 선생은 당신의 직분이 그러하듯 무지하고 몽매한 이 고장의 백성들을 눈뜨게 하는데만 주력했기 때문에 평생을 대과없이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 선생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국치이후에 모교의 교단에 일시 섰다가 일장기를 찢어버린 죄로 처벌을 당한 뒤 상경해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3·1운동후 세상을 뜨는 날까지 해외를 드나들며 군자금 모집에 평생을 바쳤다.

양 선생(兩先生)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처음 대면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행동을 같이 하게 된 것은 3·1운동이 계기가 된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양 선생은 연일 계속되는 서울 시위에 참가후 국내활동의 위험성과 조국광복의 필연성을 공감한 나머지 노령(露領)에 설립중인 사관학교에 지망했다.

영광출신의 노 준(魯 駿·도동리 133번지 출신)이라는 분이 <대동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원이어서 그의 소개로 망명을 꾀했다. 그러나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고 선생만 성공하고 위 선생은 일본 관헌에게 체포당했다.

결국 이 남대문역이 양 선생의 행로를 갈라놓은 분수령이 된 셈이다. 노 준을 포함한 대동단의 당시 재판기록 중 해당부분만을 열거해 참고로 삼는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