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조명 15 - 재판기록을 통해 본 영광3·1운동 ⑥
독립운동 위한 해외망명도 여비없어 고충피고 유경근(劉景根)은 1919년 5월중 지인(知人) 김진상(金鎭相)과 서울 보신각앞에서 해후해 동인으로부터 상해임시정부의 군무총장 이동휘가 노령 포염(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 군사를 양성하고 있는데 장차 조선의 독립을 위하는 일이니 조선내의 지망청년을 모집하여 신의주 영정을 경유, 만주로 통과하여 김성일(金成鎰)을 노령에 파견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며 나는 그 취지에 찬동하고 피고 조종환(趙鍾桓)과 구체안을 세웠다.
사법경찰관의 유경근에 대한 제2회 조서중 대정(大正) 8년 5월8일이나 6월초에 (중략)위계후, 고경진외 3인을 만나 모자를 구입, 변장시키고 신의주행의 소개장을 써 주었다. 가는 도중에 황주에서 일박한 다음 신의주에서 김성일로부터 지시를 받고 안동역을 거쳐 장춘에 건너가고 해삼위(海蔘威)에 가서는 소회선생(김진상)을 찾아 지시를 받으라고 하였다. (중략)
거기서 받은 암호문은 한글 모음과 나마자(羅馬字) 자음 그리고 한자의 수자순(數字順)으로 만들어 졌는데 그것을 가지고 포염으로 가라고 했다.
사법경찰관의 조종환에 대한 제2회 조서 중 대정 8년 5월말이나 6월 초순경 관철동(貫鐵洞) 조선여관에서 유경근과 시국문제를 이야기하던 끝에 나는 상해로부터 노령에 가 있는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친병(親兵)을 모집중인데 나도 그 계획에 찬동하고 지망자를 물색중이던 차에 15일경 운현궁 부근에서 노준과 만나 낙원동의 동인 숙소에서 상기의 뜻을 설명하였는데
그후 7월 상순 노준이 와서 고경진, 위계후 두사람이 노령행을 지망하고 남문 밖 덕흥봉(중화과리점)에 체류중이라고 하기에 나는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기네 외에 3인의 동지를 더 내려오겠다고 하기에 대단히 기쁜 마음으로 조선여관에 가 유경근에게 고(告)했더니 내일 아침 일번의 북행열차를 타라고 하였다. (중략)
3일만에 남대문역을 출발하려는데 일본 관헌의 취체가 엄중해 나와 노준은 출발하지 못하였고 같이 간 한사람은 적발당했고 기타 3인은 신의주를 거쳐 안동에 건너갔을 것이라고 공술.
사법경찰관의 노준에 관한 신문조서 중 (중략)대정 8년 6월초 다시 입경(入京)해 14일경 조종환을 만나 여비를 조달하였다고 들었고 동일 상순 같은 고향의 조규상(曺圭象)을 만나고 유성기(柳成基)도 만났는데 듣자하니 고경진 위계후 조주현 김형모(金衡模) 등이 모두 해외에 나가기 위해 서울에 와 있다는 것을 들었다.
어느날 밤 남문 밖 덕흥봉에 찾아가 고, 위 두사람이 여비를 마련중임을 알았고 7월4, 5일경 남문밖 신창상회에서 유경근을 만나 그곳에서 고경진으로부터 100원을 빌리고 나와 조규상은 남대문역에 먼저 나가 그들을 전송하려 하였고(후략)
증인 위계후에 대한 증인조서중 증인은 대정 8년 3월5일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쫓겨 정처없이 방랑하던 끝에 국경 밖으로 탈출해 자유의 몸이 되고자 생각하고 있던 차에 7월 상순 종로에서 조종환을 만나 나의 숙소인 덕흥봉에 갔다.
피고 유경근과는 관철동 조선여관과 남문 밖 신행여관에서 3회 정도 만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포염에서 군인과 교관을 양성중인데 나는 그곳에서 군인을 양성하는 목적은 장차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조선여관에서 이러한 말을 들은 사람은 나말고 고경진, 조종환 등도 있었다. 나는 군인을 지망하겠으니 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중략)
4, 5일 후 노준이 와서 조종환으로부터 나의 군인 지망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자기도 국외로 나가는 것을 희망하고 있으나 여비가 없다고 탄식했다. 1주일쯤 후에 여비는 준비됐으나 경계가 엄중해 국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무렵 나의 처남 조주현도 유경근의 소개로 신의주로 가기로 하였으나 전날과 같이 경계가 엄중하다고 하였다. 동향인 조규상도 동행키로 한 바 있다고 공술.(후략)
(2) 전주에서의 고형진과 남궁현
고형진(高衡鎭)과 남궁현(南宮炫) 두사람은 다 같이 법성보통학교 출신으로써 3ㆍ1운동 당시에는 전주신흥학교에서 수학중이었다. 나이는 고 선생쪽이 2년 위이지만 동교 기숙사에서 동고동락하던 양인은 매사 지기(志氣)가 상통했다.
전주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벌어진 날은 영광보다 하루 앞선 3월13일의 일이었다. 양 선생은 모두 이 운동의 주동자로서 시위대열의 선봉에 섰다. 그로 인해 현장에서 구금당했고 초심에서 각각 1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항소심에서는 6월로 감형됐지만 상고는 기각당했다.
출옥후 고 선생은 실형(實兄)인 경진(暻鎭)씨를 따라 군자금 모집에 다니다가 말년에는 정신착란의 증세가 생겨 유리걸식 끝에 후사도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야 말았다.
한편 남궁 선생은 군자금과 독립운동가의 가족돕기의 일환책으로 굴비 전기건조기를 발명하는 등 맹활약을 하다가 다시 검거당해 서울법원 경성법원에서 2년6월의 형을 받아 복역했고 3차로는 신간회에 가담했다가 2년의 옥고를 마쳤으니 남궁 선생은 전후 3차에 걸쳐 장장 5년6월의 옥고생활을 했다.
이제 양인이 대구이심법원에다 제출했던 항소취지문을 여기에 전개한다. 너무도 그 논지가 당당할 뿐 아니라 정열적이어서 대한남아의 기재를 보는 듯 엄숙하기까지 한다.
「지금 일본은 아라사와 청국의 2번 싸움에 이긴 여세를 몰아 무력적 수단으로 우리의 상국을 빼앗고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 조중응 등과 결탁해 우리 임금을 협박해 을사조약 정미조약 등을 강압적으로 체결해 우리나라에 대해 견딜 수 없는 학대와 고통을 주었다.
<다음호 계속>
저작권자 © 영광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