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금지’가 포악하게 써진 담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담벽 귀퉁이에 한줄 글이 더 보이길래 자세히 보니 “낙서금지라고 쓴 사람만 낙서했네”라고 누군가 얄궂은 낙서를 하였더군요. 낙서落書위의 락서樂書라며 혼자 말장난을 하며 담벽을 지나쳤지요.
중견화가의 그림에 말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본 유명한 고승이 그림 아래에 “이 말 참! 잘 그렸다”고 낙서를 했습니다. 화가는 어처구니없어하고 있는데 덩달아 어느 유명인이 “나도 동감”이라고 낙서를 했더랍니다. 유명인들의 낙서로 더 알려졌다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조선후기 책 대여점인 <세책점>에서 대여된 책에는 낙서 때문에 점주가 골머리를 앓았다지요. 책을 빌려본 사람들이 짤막한 낙서로 여백을 채워버렸으니 말입니다. 대신 낙서를 통해 후대 사람들은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것 등을 봐도 낙서가 반드시 저급하고 조악하며 가치가 없는건 아닌듯합니다. 낙서가 문화창조의 시작이란 말도 톺아볼 일입니다.
불갑산 낙서 이야기 좀 하렵니다. 작년 10월 함평에서는 불갑산 연실봉 정상에 모악산이라 새긴 표지석을 헬기까지 동원해 기습적으로 설치하였습니다. 영광군과 함평군은 물론 전남도 지명위원회에서도 뚜렷한 방안을 내놓지 못해 명칭논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터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그 표지석에 누군가 스프레이 낙서를 하였더군요. 함평에서는 방송국 취재까지 요청하며 낙서를 기회로 불갑산이 모악산이라고 거세게 주장하려는 듯 대열을 정비하는 모양입니다. 경찰서에 고발까지 하였더군요. 누구를 의심하며 경찰서에 고발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며 방송사도, 함평경찰서도 불갑사를 취재하고 경위를 조사해 갔습니다.
영광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관광의 중심에 있는 불갑사 불갑산이 명칭논란으로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때입니다. 하다하다 낙서의 범인으로 오해를 받는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으니 필자만의 과잉반응일까요?
그래서 ‘스프레이 낙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낙서는 누가 먼저 했을까요? 지금 표지석 자리는 과거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를 올렸던 천제단입니다. 영광군과 함평군에 뻗어 내려가는 정기를 압살해가며 그곳에 ‘불갑산을 모악산이라 낙서한 표지석‘을 박아대지 않았던가요? 영광군 역사와 문화의 여백에까지 낙서를 한 것은 아닐련지요?
아무도 낙서하지 않을 담벽에 함평에서 먼저 ‘낙서금지’라고 낙서를 한 거나 다를 바 아닙니다. 그러니 스프레이 낙서는 낙서落書위의 락서樂書의 기억을 불러낼 밖에요. 유명인들의 낙서로 유명해진 그림처럼 불갑사 산지 일원이 국가명승으로 지정된 즈음에 스프레이 낙서로 우리 불갑산이 더욱 선명하게 알려지는 기회가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여태 치기어린 말들을 하면서도 한켠에는 아쉬움이 너무도 큽니다. 노엽기도 합니다. 행정구역의 통합마저 거론될 만큼 인구감소로 지역이 소멸될 위기에 처한 때입니다. 지명을 어떤 셈법으로 계산을 하였기에 지금의 낙서 사건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무릇 정치라는 것은 분쟁을 해결하고 갈등을 풀어주는 것일 겁니다. 전남도의회에서 5분 발언을 통해 처음 분란을 초래했던 함평군 모정치인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의원님이 생각하는 정치는 과연 무엇입니까? 한 정치인의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두 지역의 행정 그리고 민간인들간의 피로한 다툼은 계속 벌어질 듯합니다. 그러한 이유입니다. 연접된 지역을 하나로 묶어보는 큰 안목을 지닌 어른정치의 부재가 아쉬운 것 말입니다. 지역을 갈래지어 오는 피해는 고스란히 영광, 함평군민이 받고 있으니 노엽다는 것이고요.
불갑산 자연환경보존대책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