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체포 처형에 동료 배신자 역할 커 … 동학농민혁명, 의병운동 항일무장투쟁으로 계승
5월11일 제130주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즈음해 혁명의 발원지이며 역사의 획을 그었던 각지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가 연이어 열렸었다.
반면 영광군은 조용하다. 동학농민혁명과 연관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몰라서이다.
본지는 동학농민혁명 제130주년을 맞아 2005년 영광지역 근현대사 조명 첫번째 시리즈로 연재했던 당시 영광문화원 조남식 전 원장의 <동학농민운동과 영광>을 통해 영광지역에서 전개됐던 동학농민혁명을 1066호에서 살펴봤다.
1067호부터는 <영광군지>에 게재된 원광대 박맹수 전총장의 <근대 독립항쟁기의 독립·사회운동>편에 게재된 내용을 발췌·편집해 영광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살펴보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개된 영광 항일의병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20여년 동안 꿈쩍하지 않고 있는 역사 재조명과 부활, 선양사업을 통해 군민들의 자긍심을 찾기 위해서다.
/ 편집자 주
영광의 동학농민군
영광 출신 농민군 지도자로서 체포되거나 처형당한 농민군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영광군 도내면 고성리 출신인 서우순은 1894년 10월에 무장 장재면 남계리에 사는 오응문을 통해 동학에 입교하여 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12월5일 함평 출신 농민군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영광 동부면 출신 농민군 지도자 양경수는 11월20일 영광읍내의 향리들이 수성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자 영광읍을 다시 점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12월3일 영광읍내에 거주하는 진사 김응선을 중심으로 조직된 수성군에 체포되어 12월5일에 처형당하였다. 또한 12월5일에는 영광 홍농면과 법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송문수가 한때 그와 함께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했던 이현숙에 의해 체포되어 효수당하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1894년말 농민군들의 체포 처형에는 동료였던 배신자들의 역할이 컸다.
영광 홍농면 출신의 이현숙은 법성포의 진리鎭吏로 갑오년 봄에 동학에 들어가 오래 몸담은 사람보다 더 동학교도 행세를 잘하고 농민군 행세를 했던 인물이었으며, 겨울에 이르러 그 두령 오시영을 잡아 관병에게 넘겨주고 많은 상을 받았다고 전한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본군 홍농면에 사는 이현숙은 의병을 많이 일으켜 동학 괴수 송문수를 체포하여 머리를 잘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공로로 선봉진 별군관으로 임명되었다.
송문수와 함께 활동했던 농민군 지도자 오태숙 역시 12월5일에 체포되어 효수 당했으며, 농민군 최준숙 등 9명도 역시 포살되었다. 또한 박인지 등 10명은 장위영병에 체포되었으며, 12월12일 무장에서 체포된 송진팔 등 18명은 영광으로 압송되어 그 활동의 경중에 따라 처벌되었다.
1895년 1월20일에는 법성진의 동학농민군 남궁달·박복암 등이 체포되어 나주에 있는 우진영으로 압송되었으며, 이날에 지도자급 인물들인 오홍순·이만순·김풍종 등도 체포되었다.
따라서 농민군 진압부대의 하나인 좌선봉진 대장 이규태가 무장·광주·담양·장흥·무안·함평·동복·흥양·부안·장성·고부 등과 함께 ‘동학의 대소굴’이라고 지칭할만큼 동학교세가 탄탄하고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했던 영광은 그만큼 피해도 컸다.
영광농민군들이 무장농민군들과 함께 진도 일대까지 진출하여 폐정개혁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희생될 정도로 전라도 서남부지역에서 커다란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농민군들은 멸문의 횡액을 당할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전라도 서남부지방까지 진주했던 일본군과 경군에 의하여 처형당한 뒤에도 유생이나 향리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보군에 의해서도 무서운 살육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록이나 이야기들이 얼마만큼 묻혀버렸을 것인가는 쉽게 짐작되는 것이다.
끝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난 새종교로서 착실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구도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불법연구회 창건사佛法硏究會 創建史>에도 그와 농민군에 관한 일화가 실려있는 사실로 보아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동학의 세계관이나 역사의식을 기초로 하여 창교되는 증산교 및 원불교 등의 신종교 창교운동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현실 변혁의 이념으로 복무했던 동학이 1894년의 봉기로 인하여 거듭되는 수난의 길을 겪게되자 증산교의 강일순·원불교의 박중빈 등은 보다 관념적인 종교운동의 길로 나아간 것은 아닐까.
동학농민혁명 이후 봉기에 가담하였던 지도자들과 대다수 농민들의 추이를 검토하는 가운데, 혁명 실패 이후 전라도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신종교운동과의 관련성을 밝히는 일도 역시 향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항일의병운동의 전개와 영광의병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은 항일무장투쟁이다. 이는 어떤 조건부 독립에도 동의하지 않는 절대 독립노선이었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으로 일제를 추방해야 한다는 독립전쟁론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한국독립운동사는 1895년 의병운동·전쟁에서 시작되어 무장독립전쟁에 의해 1945년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반세기에 걸쳐 전개된 것이었다.
항일의병은 19세기말 일제의 침탈 추이에 따라 4단계에 걸친 근대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전기(제1기)는 1894년 7월23일 일본군의 불법적인 경복궁 침입에 항의하여 일어난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및 단발령 시행에 대항하여 일어난 을미의병 단계를 거친다.
이를 이어 1905년에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해 강요한 을사늑약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중기(제2기) 병오의병으로 발전하며 그 다음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에 이은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대항한 후기(제3기) 정미의병으로 지속되었다. 1910년 이후 전환기 의병(제4기)은 후기 의병이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커다란 희생을 치른 후 다시 재기한 의병들이 활동을 계속하면서 점차 만주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 전쟁으로 전환되어 가는 단계를 말한다. 이러한 의병운동의 추이에 따라 영광에서도 호남지역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기 의병
1894년 7월23일 새벽, 약 8천명의 일본군은 국왕 고종이 머물고 있는 경복궁을 무력점령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이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출병해 있었던 일본군이 조선의 끈질긴 철병요구를 끝내 무시하고 자행한 폭거로서 명백한 국제법 위반행위였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물론 재야 유생들 역시 국가적 위기인 변란으로 인식하고, 각지에서 일본군 축출을 위한 의병봉기가 잇따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경상도 안동에서 봉기한 서상철의 의병이었다.
또한 전라도에서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부가 집강소 통치체제를 마무리하고, 재봉기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갑오의병 당시 영광을 비롯한 전라도 각 고을은 대부분 농민군이 설치한 집강소 통치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과 대립하고 있었던 양반유생들은 의병을 모집하거나 조직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일부 유생들은 농민군이 서울에서 일어난 변란소식을 듣고 일본군 축출을 위해 재봉기하려고 하자 이에 적극 합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독자적인 의병활동 움직임은 거의 드러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영광지방 역시 전라도의 일반상황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므로 독자적인 의병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896년 전라도에서 송사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과 향리들이 중심이 된 나주의병이 일어나 전기의병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된다.
장성의병은 기정진의 문인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노사의 재종질인 기삼연·고광순·김익중·정의림 등으로 노사의 손자인 기우만이 핵심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문인으로 영광에 거주하고 있었던 후은 김용구에게도 연락이 왔다. 물론 김용구는 늙은 모친을 시봉하기 위해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며, 그를 비롯한 영광유생들이 장성의병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흔적은 보이지 않으나 그가 정신·물질적으로 적극 후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성의병이 일어날 무렵 나주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나주의병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킬 것은 장성 기우만으로부터 온 격문이었으나 그 요인은 동학농민혁명이후 일제의 침탈속에서 추진되고 있었던 개화정책이었다.
나주의병은 1896년 음력 2월9일에 봉기하여 참서관 안종수·총순 박모·순검 여모 등 개화파 관료처단을 통해 개화정책에 대한 항거입장을 분명히하고, 인근지역에 통문을 돌려 동참을 촉구하였다. 이에 함평·능주·무안의 유생들이 호응하였으며, 영광에서도 향리 정상섭이 가담하였다.
이들 의병은 서울에서 파견된 친위대가 남하하고, 전주 진위대의 가담자 체포속에서 음력 2월28~29일경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중기 의병
중기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1906년에 활발하게 일어났다. 호남에서 가장 먼저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일찍이 1896년에 장성에서 거의한 후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 1월 척왜기의斥倭起義를 촉구하는 통문을 전라도 각 군에 발송했으나 일제에게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남의 중기 의병은 1906년 6월에 면암 최익현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봉기한 것을 계기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6월4일(음력 4월13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봉기하여 태인·정읍·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다.
최익현의 봉기는 호남 각지의 봉기에 일정한 자극제가 되어 1906년 11월의 구례·창평의병, 12월말 남원의병, 1907년 3월 고광순 의병의 재기 등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중기의병은 기우만의 통문발송과 최익현의 태인 의병봉기 등으로 대표된다. 이 단계에서 기우만의 문인인 영광의 김용구는 일찍이 장성의병에 참여했던 기우만의 종숙從叔인 기삼연과 함께 1906년 이른 봄부터 의병봉기를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가 남긴 일기에는 당시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용구는 1906년 봄부터 이미 국가를 회복할 계획인 의병을 모집하여 봉기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의병봉기에 뜻을 같이할 인물들인 영광관내의 여러 지사를 물색하면서 기삼연이 거의의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여러달에 걸쳐 영광과 장성을 오가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영광지역 지사들과 함께 ‘일심계’를 조직하고 매월 모임을 가져 사전에 의병봉기를 위한 조직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들 지사들은 이대극 등과 같이 1906년 초부터 의병활동에 뜻을 둔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후기의병에 속하는 호남창의회맹소 호남의병진의 주축이 되었다. 일심계 회맹원 64지사 중에서 영광 출신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용구·이대극·조희경·봉제칠·조사행·노공삼·정영관·강진화·정동수·김홍택·이용랑·정익노·이공삼·이문복·이문표·김준문·이종택·정희만·김성식·정대수·이우상·이병주·김기준·정영풍·이필섭·이형의·이기종·이기영·김봉헌·이계택·박래효·심홍렬·오태윤·김백향·박정여
후기 의병
후기 의병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에 따른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따라 전개되었다. 또한 이해 8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은 종래의 의병활동을 한단계 발전시켜 전국적 규모의 대중적 투쟁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해산 군인이 의병활동에 직접 가담함으로써 의병들의 전투력 강화와 의병지도부의 구성뿐만 아니라 의병부대의 조직 및 전술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호남지방 의병활동은 후기에 들어 전·중기 때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양상을 보이는데, 역시 그 시점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과 거의 같다.
이 단계에서 영광의 김용구는 1906년부터 장성의 기삼연과 함께 거의 준비를 하면서 일심계를 조직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1907년 8월8일 영광에서 기삼연과 동맹맹서한 후 8월11일에는 김형식·박용근·이대극·오태윤·정희면·이종택 등과 함께 의병 수백여명을 모집하여 일본군 수비대 등과 수차례 접전하여 전과를 올리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김용구 등 영광지사들은 9월24일(양력10월30일)에는 대장 기삼연과‘ 호남창의회맹소’의 호남의병진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를 주도한 기삼연은 그의 족질 기우만이 1896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모로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독자적인 의병봉기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1902년 2월 전주 진위대에 동학농민군 접주 출신인 김문행과 공모하여 거의하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물론 그는 호남지방에서 기씨문중이 지니고 있었던 명망 덕분에 석방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체결 직후부터 재차 거의할 계획으로 호남 각지 유생들과 연락을 도모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광의 김용구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은 그 대표적 사례중의 하나로서 이들 호남지역 유생으로는 고창 출신의 이철형·창평의 고광순·능주의 양회일·나주의 김준·장성의 김익중·함평의 이남규 등이 있다. 이로써 그는 장성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진을 결성하고, 5백여명의 의병으로 봉기를 단행하였다. 당시 이 의병진에 참여한 김용구의 일기를 통해 지도부의 구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맹주 기삼연 장성, 도통령 김용구 영광, 선봉 김준 나주, 중군 이철형 고창, 후군 이남규 함평, 호군 김태수, 참모 김익중 장성, 서기(참모 겸임) 김봉수 장성, 주기감 이대극 영광
위의 내용을 통해 호남창의회맹소 의병진 지도부가 주로 장성·영광·나주·함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광 출신 김용구가 도통령에, 이대극이 주기감을 맡는 등 영광 출신인사들이 지도부의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된다. 이는 김용구가 그의 일기에서 기삼연이 “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하는데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내가 그를 찾아가고 옹이 나에게 온 것이 여러달이 되었다”는 내용과 직결된다. 따라서 기삼연의 의병진은 김용구를 비롯한 영광유생들과의 적극적 연대와 협력, 참여속에서 결성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광 출신의 김용구·이대극·정대홍·정대인·조정룡·박경욱 등은 이름난 의병장들이며, 강필이·김기봉(김용구의 아들)·김병섭·김용북·변영서·이범진·김정수·최경조·조성인·정진옥·최조진·김정거·김정겸·박경옥·조일대·이승정·최판대·김봉전·박성장·김동진·정진삼·최화서·정찬국·안병련·탁명희·김익삼·김창욱·이성숙 등은 1906년경부터 1910년 사이에 매우 눈부신 활약을 전개한 영광의병들이었다.
이들 의병진은 10월말부터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벌였는데, 그 지역은 주로 장성·영광 법성포·함평·고창·나주 등지였다. 이처럼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활동이 영광 법성포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배경에는 영광 출신 유생들이 적극 참여하고, 각 지역출신 지도부를 중심으로 각각 독립적인 활동을 벌이는 가운데 연합부대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김용구는 ‘회맹소’ 의병진에 참여하기 이전부터 영광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의병활동을 이미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회맹소와의 ‘합진’과 ‘분진'을 계속하면서 활동하였다.
김용구 의병부대의 대표적인 합진활동은 1907년 12월7일(음력11월3일)의 법성포 야습과 23일(음력11월19일)의 영광읍 습격으로 그 교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기록에 잘 나타난다.
이처럼 12월7일에 기삼연 의병진과 합진한 김용구 의병부대가 법성포를 야간기습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을 벌인 사실은 일본측사료인 <전남폭도사> 와김용구의 <의소일기>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이는 의병진이 상당한 전과를 거두고 무사히 퇴각한 것에서 합진의 위력이 컸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남지방 의병활동은 1908년에 접어들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김용구 부대는 1908년 4월12일(음력3월12일)에도 구수산 일대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격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4월23일에는 홍농면 대덕리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5월16일 무장 와공면(지금의 홍농면 유동)에서 한국주차군 제14 연대 휘하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던중 총상을 입어 더 이상 지휘가 어렵게 되자 평민출신박도경(일명 박포대)에게 일임하고 장성 백암산으로 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김용구가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극·박경욱 등 영광 출신 의병장들은 독립부대를 이끌고 끈질긴 활동을 지속하였다. 1908년의 경우, 1월25일에 의병 80여명이 영광 부근에서 교전하는 등 17차례 이상, 1909년에는 4월5일에 의병 100여명이 영광헌병분견소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등 12여차례 이상의 교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중에서 이대극은 1906년초에 의병을 일으킨 후 호남창의회맹이 결성되자 이에 가담하여 문수사·법성포·고창성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에 맹주 기삼연이 처형당하자 호남창의군대장을 맡아 무장 고산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리다가 1909년 3월에 일본군의 현상금 술책 등으로 현홍농읍 월평리에서 피살되었다.
이러한 의병활동은 일본군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하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은 후기 의병의 중심적 활동무대인 호남지방 의병들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1909년 9월1일부터 10월25일까지 55일에 걸쳐 ‘교반적攪拌的’ 방법에 따라 수행되었다. 특히 여기에는 종래에 없었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고, 일본군 수비대병력뿐만 아니라 경찰과 헌병까지 총동원된 합동작전이었으며, 면장이나 이장 등 말단 행정기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지극히 야만적이며 잔혹한 작전이었다. 이러한 작전은 이미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시행했던 폭압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1909년 9월 이후 전라남·북도 일대 촌락을 최소 2회 이상으로 십여차례에 걸쳐 반복 수색하면서 20~60세의 남자들을 면장이나 이장, 동장의 입회하에 민적民籍 명부와 대조하면서 의병을 색출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수색속에서 의병장이나 일반 의병들이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피신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체포되거나 전사함으로써 호남지방을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던 후기의병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영광 출신 의병들 역시 그 예외가 아니었는데,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체포된 영광 출신과 영광에서 체포된 의병장들은 오영수, 노동연, 강필이, 김재명, 최경조, 김용북, 임처영, 박성창 등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전환기 의병(1910년 11월~1915년)’은 1912년 고종의 밀명에 따른 임병찬의 독립의군부가 대표적인 단체에 속하였다. 이후 의병전쟁은 간도·연해주로 이동하여 해외의독립군 전쟁으로 확대 전환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