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WTO각료회담 무산위한 8박9일 원정투쟁기 ③
19일 출입국시설 및 구치소에 감금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한국 국민들이 900여명이나 연행되었는데도 총영사관은 움직이지도 않고 있으며 자국민을 보호해 주는 게 역할인데도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미국과 WTO의 주구가 되어 쌀협상 국회비준까지 하더니 이제는 자국민을 버리는 더러운 노무현 정권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감된 16명의 영광투쟁원정단은 우리 정부의 방치 속에서도 홍콩 민중연대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접견하고 현지 목회자(예수교장로회 소속으로 WTO반대 기독교 목회자 회원)의 통역으로 우리의 주장을 요구했다.
오후 8시 구치소를 나와 각각 흩어졌던 16명의 영광투쟁원정단은 10시가 되어서야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상봉도 잠시 바로 짐을 꾸려 공항으로 직행해 겨우 11시40분발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20일 새벽 6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바로 청와대 앞에서 노숙투쟁을 하고 있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지도부를 지지방문하고 경찰폭력에 산화한 전용철, 홍덕표 농민열사의 사인규명과 함께 책임자 처벌,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는 약식집회를 갖고 영광으로 발길을 실었다.
오후 3시 영광군청앞에 도착한 후 폭설피해 대책과 쌀 적재문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8박9일간의 '홍콩WTO각료회담 무산을 위한 원정투쟁'을 정리했다.
투쟁기를 마치며 한국 보수언론들의 무차별적 만행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기에 한마디 덧붙인다. "농민들이 기어이 홍콩에서 '한국형 시위'를 벌임에 따라 우려가 현실화됐다"며 "농민이 어렵다는 건 다 알지만 시민들의 공감 여부는 그 분노의 표현방식에 따라 다르다.
농민들은 삼보일배로 쌓은 좋은 이미지와 스스로의 정당성을 마지막 폭력시위로 날려버린 것으로 한국 농민들이 '폭도'로 낙인찍힘으로써 나라를 망신시켰다"는 힐난이 들어 있는 보도였다.
외국언론 "홍콩당국의 시위대응 의문"
그러나 <인터내셔널 해럴드트리뷴>지는 "이번 충돌은 1999년 시애틀 각료회의에 비해 훨씬 분노가 덜했고, 시위도 덜 폭력적이었다"고 보도했고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는 "홍콩시위는 1999년 시애틀시위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는데 구속자는 1999년의 500여명보다 훨씬 많은 900여 명이다. 시위에 대한 홍콩당국의 대응에 의문이 제기된다"는 내용으로 국내 언론의 반응과 사뭇 다르다.
또한 홍콩 <명보>지는 60%의 홍콩 시민들이 시위대에 동조했으며 '시위대의 폭력'을 지지한 게 아니라 WTO 체제와 빈부격차, 환경파괴, 부채, 착취, 불공정무역, 개발 등 시위대가 제기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공감의 내용을 밝혔다는 보도이다.
보수언론이 말하는 '폭력시위'라는 표현에 들어 있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농민들이 가진 물리력은 일반 시민은 절대 공격하지 않는 것이었음은 물론이고 이번에는 반세계화 시위의 관행인 '맥도날드ㆍ스타벅스 부수기' 등의 사유재산 침해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홍콩 도심의 상점들은 시위 첫날 일제히 문을 닫았다가 홍콩투쟁원정단이 상점 침입은 전혀 안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17일에는 모두 다시 문을 열었다.
침입 우려에 문닫은 상점이었지만
우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하였던 것은 삶을 건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의사표시'였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좌지우지할 수 있는 논의들이 저 멀리 컨벤션센터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정작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거부의 표시였다.
컨벤션센터에 가능한 한 가까운 곳에서 의사표시를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당국의 명령을 어겨야 했다. 그 상황에서 발생한 물리적 충돌은 '상황'의 부산물이지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
삼보일배만 하면 '착해서 동정받을 자격이 있는 시위대'이고 허가구역을 거부하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면 '나쁜 짓 했으니 모든 게 무효'인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국민과 군민 여러분의 올바른 이해를 구한다.
장영진 사무국장<영광군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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