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 광복 이후의 영광 ④ - 미 군정기의 정치·사회적 혼란
광복 이후 영광에는 식민사관 극복과 내재적 발전을 모색하고 지역의 전통문화를 되살려내야 하며 정치사회적 안정 등의 중요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영광사회는 요동하는 한국정치 정세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미군정은 인민위의 대체세력을 형성하려는 목적으로 각계의 인사들을 지사의 고문으로 임명해 고문회를 구성했다.
고문회의 직접적인 기능중 하나는 지방의 민의를 파악해 민주적인 대의정부의 수립에 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내의 각급기관에 충원될 인사를 추천하는 일이었다.
대다수가 보수적 인사로 구성된 10여명의 지사 고문회는 미군정 도고문회의 자문을 얻어 도지사 이하 군수급에 대한 인사를 실시했는데, 미군정은 1946년 3월9일 김영하(당시 44세)를 군수로 임명해 영광군의 행정을 담당케 했다.
별다른 저항없이 군청은 재조직됐고 영광군 경찰도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해 인민위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한 조직으로 약화됐다. 그러나 인민위가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었고 미군정과의 정면대립을 피하면서 전국의 동향을 살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군정 우익세력 강화위해 정당등록 제도화
한편 1945년 10월16일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고 11월23일에는 김 구, 김규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20여명이 귀국했다. 여러 갈등 속에서 정부수립을 위한 권력암투의 서막이 올랐다.
1945년 11월19일 미군정은 좌익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당등록의 법적조치를 취했다. 이는 도내의 정치, 사회조직 중 미군정 정책에 우호적인 조직과 적대적인 조직을 정확하게 파악해 적절한 대응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촉진국민회가 결성되고 이어 한독당 등의 정치단체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한민당·한독당과 더불어 1946년 4월에 대한민주청년동맹 전남연맹, 1947년 3월에 조선민족청년단 전남도단부가 결성됐고 그 외 광복청년단, 전국학련(전국학생연맹), 건국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많은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조직돼 활동을 개시했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31일 창간한 전남신보를 정간하게 하고 사장·편집국장 등을 퇴진시킨 후 호남신문으로 개칭하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광주민보도 폐간조치후 동광신문으로 개칭했으며 미군정 정보국장의 지시에 따라 전남기자협회가 조직돼 1947년 6월14일 광주기자회로 발족되기에 이르렀다.
영광지역 이념 달리하는 양대세력 형성
한편 인민위의 지하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영광에서는 한민당과 민족청년단, 서북청년단, 학련 그리고 나중에 이들 조직을 통합한 대한청년단 등의 조직이 결성됐다. 이로써 영광지역에도 이념을 달리하는 양대 세력이 형성됐다.
학련 전국위원장은 국회의원도 했던 이철승이고, 영광총책 그러니까 영광군위원장에 박동을, 부위원장에 김순섭이가 맡았고 동원부와 훈련부가 있었는데 핵심 역할을 했던 수가 삼십 여명 되었지요. 우리는 반탁을 했고, 계몽활동을 했는데 학교에 가서 연설을 하는 거여, 왜 신탁을 하면 안 된다는 것과 조만식, 여운형 등은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는데 찬탁하는 사람들과 별일은 없었어. 영광에 찬탁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 가족들도 많았고, 나는 학련운동을 하였으니까 우익이지요. 그때 영광이 모스크바였어요. 메쟁이가 가고 나서 빨갱이와 공산주의자들이 판을 쳤어요. 우린 당연히 반탁을 했지요.
그 때가 1946년 영광보통학교입구에서 건준위원들과 같이 삼일운동 기념하는 날이지요. 내 생애 처음으로 정치적 의사표명으로 ‘찬탁’연설을 한 뒤로 학련 등에 가입된 청년들의‘반탁’의 외침을 보고 아! 정치라는 것을 느꼈어요. 여운형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조직이 영광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 반대세력이 조직되었어요.
- 정00, 서00, 한00, 조00의 증언 교차확인 -
일제하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광복이 되자 건준을 중심으로 민립중학을 세우고 교육과 행정·적산·치안을 담당했다. 그들은 민족운동에 참여해 항일운동 등을 했다는 지역적 정통성을 내세워 영광지역의 정치를 주도하고자 했다.
미군정 지역 정치구도 변화 가져와
그러나 그들은 미군정의 우익세력 양성과 좌익세력 탄압 아래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영광의 지역정치에서 밀려났고 그 정통성은 부인됐다. 이어 그들은 찬탁이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반탁을 주장하는 세력과 한층 더 갈등을 빚게 됐다.
광복은 곧바로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한국사회의 각 지역에서는 탈식민사회를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주체적인 문제가 주어졌다. 해방과 함께 최초로 등장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그 움직임의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건준이 내세운 첫번째 강령은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이었다.
해방 2주일 만에 건준은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설립하면서 급속히 확장돼 갔다. 그러나 미군정은 건준과 인공을 부인하고 새로운 국가기구들을 수립했고 이것은 지역의 정치구도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1946년 11월 봉기시의 영광
영광의 인민위는 미군정의 해산명령이 있은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의 찬탁, 반탁의 문제는 좌우대립을 급격히 심화시켰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익세력이 점차 지역정치의 헤게모니를 잡아나가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심적인 인물은 조○○, ○동○, ○○진, 심○○, 김○○ 등이었다. 그리고 독촉 영광지부가 ○○현을 중심으로 조직됐으며 ○○규를 중심으로 한 한민당의 활동이 탄력을 받게 됐다.
총독부를 대신해 군정청이 통치의 주체가 되면서 미군정 정책에 불만을 갖고 저항하는 사례가 계속됐다.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10·1사건 이후 남한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농민·노동자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10월말 이후에는 전남 일대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농민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를 ‘추수봉기’라고도 한다. 이는 미군정 정책에 대한 지방민들의 저항이었다.
기층세력 저항에 무력진압 불만 고조
미군정 초기의 정책을 보면 한국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경제적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치조직인 건준과 인민위가 해산됐고 농민조합과 노동조합도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토지개혁이나 적산처리와 같은 현안도 한국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사회적 혼란을 틈탄 매점매석도 불안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전염병에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까지 겹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특히 농지문제와 식량문제가 시급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지주들이 갖고 있던 전체 농지의 13.4%가 미군정하의 신한공사의 토지가 돼 소작인들은 해방이 됐어도 여전히 소작인을 면치 못했다. 또한 미군정은 식량난 해결을 위해 미곡통제령과 미곡수집령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각 지역의 행정부서는 군정청에 미곡을 강제로 수집해 주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과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농민들은 공출방법이 일제 때보다 더 혹독하다고 불평했고 저항하는 농민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례까지 발생해 농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됐다.
어민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전남지역 어민들은 1할~1할5부라는 고리대금에 시달려 그 부채총액은 약 25억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광군 낙월면 어민들은 연간 1억원이 넘는 어획고를 올리고 있었으나 고리부채가 2천만원이나 됐다.
이 같은 미군정 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고 가장 큰 규모로 저항했던 곳이 바로 전남지역이었고 이 시기에 봉기가 주로 일어난 곳은 목포와 광주 그리고 그 인근지역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봉기가 많았던 지역은 목포와 나주, 광산이었다.
11월5일, 6일 잠시 뜸하다가 7일, 9일에는 고흥, 보성, 장흥 등에서, 11일부터 17일 사이에는 해남, 강진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고 특히 해남에서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전남지역에서의 시위는 1946년 10월 화순의 광부들이 ‘식량을 달라’고 외치며 광주로 행진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나주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점차 인근지역으로 확산됐다.
영광지역 46년 11월 봉기 시위군중 사망
영광에서는 11월3일과 4일에 봉기가 있었다. 이에 앞서 10월31일 홍농면의 경찰초소가 5명의 좌익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봉기를 위해 총기를 탈취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11월3일 영광읍에서 600~800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경찰서에 이르기 전에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군중들은 몇몇 민간인의 집에 피해를 입혔으며 군중들은 6개 그룹으로 잘 조직돼 있었고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고 한다. 지도자는 오명환 외 3명으로 밝혀졌다. 11월4일에 주모자 가운데 2명이 검거됐다.
같은 날 10시30분 홍농면에서는 약 300여명의 군중이 경찰지서를 습격해 각종 서류를 탈취하고 지서에 불을 질렀다. 지서주임은 군중에 의해 심하게 구타당했고 다음 날 11월4일 새벽 1시에는 숫자미상의 군중들이 군남지서를 습격했다. 경찰의 발포로 4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2명은 경상을 입었다.
이에 자극받은 군중 수백명이 이날 오후 2시 경찰지서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군중들은 해산됐으며 이 때 시위자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이 영광면, 홍농면, 군남면에서 큰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고 시위 군중 12명이 사망하는 등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봉기후 좌익 수배령 등으로 기반 상실
당시 인민위의 좌익세력들은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인민위의 연대세력으로 전남지방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지방당 조직과 전평과 전농 등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때의 봉기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6년 11월의 봉기 이후 좌익세력 상당수가 수배령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 더 이상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추수봉기를 기점으로 좌익세력은 점차 기반을 상실해 지하로 스며들게 됐고 일부는 타지로 피신하거나 입산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위 참여로 인해 경찰의 체포령에 쫓기게 된 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면서 이른바 ‘밤손님’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이들은 불갑산을 중심으로 태청산, 군유산, 구수산 등 거점이 될 만한 산에서 전국적인 추이를 살피고 은신하면서 지하활동을 통해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교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48년 가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영광의 산간지역에 숨어있던 빨치산의 활동도 활발해 졌다.
광복이 됐지만 지역민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틀은 없어 보였다. 대립의 정치문화가 판을 치고 좌·우사상이 일상을 지배해 버린 당시 지역이라는 생활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생활의 문제들을 직시하면서 실천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일이 중요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선택해야 했다.
미소공동위 회담 결렬후 좌익 탄압거세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일관된 틀을 갖추고 있는 것도, 일사불란한 실천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좌·우익사이의 ‘자연스런 관계의 상실’로서 투쟁적 조건임을 암시한다. 좌·우익들은 자기지역의 경계선을 넘어 일상적인 경험의 장들을 넓혀가고 있었으며 주민들은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비역사적 장소에 살게 됐다. 당시 한국사회가 처했던 상황이 그랬다.
1947년 7~8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 결렬을 계기로 좌익뿌리뽑기가 본격화됐다. 이것은 정부수립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저항세력의 제거를 의미했다. 즉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따른 단일정부수립은 좌우연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제거할 필요가 없었지만 단독정부수립이 확실해지자 좌익과 공존할 이유가 없었다. 타협의 가능성은 소멸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익청년단체는 물론 온건 중도파에게도 영향을 미쳐 8월11일부터 좌익에 대한 대규모의 체포가 잇따랐다. 1947년 7월19일 여운형이 암살됐다. 그의 죽음은 좌우 어느 쪽에 의해서였든지 간에 지난 2년간의 정치투쟁의 역전과 갈등 그리고 한 전환점을 의미했다.
1948년 전후 상황
1948년도에 발생한 ‘2·7구국투쟁’은 좌익세력들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방침에 반대해 1948년 2월7일을 기점으로 전개한 여러 가지 형태의 투쟁을 가리킨다. 즉 유엔결의에 의해 조직된 유엔한국위원단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자 좌익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들 투쟁을 2·7구국투쟁이라고 부른다. 당시 여러 가지 형태의 투쟁이 있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이 무장투쟁이었다.
1948년의 2·7구국투쟁과 그 후에 전개된 5·10선거 반대투쟁은 남로당의 전술로 볼 때는 합법과 비합법의 혼합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과 비폭력의 혼합투쟁이었다. 즉 이때부터 본격적인 좌익 무장세력인 야산대가 조직됐던 것이다.
야산대는 좌익 중에서 군 경험이 있는 자나 1946년 10월 대구봉기이후 수배령에 쫓기고 있던 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는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개 군에 50~100여명 정도였다. 이 시기 남로당의 주된 목표는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창건이었지만 2·7투쟁을 계기로 야산대가 조직되면서 무장투쟁이 부분적으로 채택됐다.
영광의 야산대는 인민위 해체 당시의 몇 명의 인사와 그들을 따르던 청년들 그리고 추수봉기 이후 수배된 자들과 남로당에 자진가입한 자,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자들로 조직된 이른바 ‘구 빨치산’으로 불갑산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48년 2·7투쟁후 영광에도 야산대 조직
유격투쟁전술 등 무장투쟁이 좌익세력의 중심적인 주요전술이 된 것은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이후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20일 제주도지역의 좌익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14연대 병력들이 이를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던 사건이다.
이 봉기군이 진압군에게 밀려 지리산으로 후퇴하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유격전구가 형성됐고 이를 토대로 전남·북과 경남·북의 각 지역에 무장투쟁세력이 체계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무장세력의 활동영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영광지역에서도 비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하조직원들이 산악지대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미 조직돼 있던 야산대 활동이 강화됨으로써 유격전구라고 부르는 활동구역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형성되었던 유격전구는 다음과 같다.
- 호남유격전구 : 영광, 나주, 함평, 장흥 등 주로 전남의 서남부지역으로 대부분 높지 않은 산(함평, 영광 경계의 불갑산, 장흥 유치의 국사봉 등)을 끼고 있는 평야지대로 유격대 활동에 불리하지만 산세가 은신하기에 좋고 주변농민들의 저항이 적으며 해안에 접해 있고 지리산지구와 가깝기 때문에 무장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 지리산유격전구 : 남한유격대의 총본산으로 남으로 백운산, 북으로 덕유산에 연결되는 전남·북, 경남의 산악지대에 넓게 걸쳐있는 유격전구이다. 장성, 영광, 함평, 무안 등 호남유격전구의 여러 지역이 지리산유격전구의 영향 하에 있었다.
- 태백산유격전구 : 태백산,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안동, 청송에 이르는 지역이다.
- 영남유격전구 : 경북의 경주, 영천, 청도, 경산, 대구 주변 일대와 경남의 양산, 울산, 부산 주변 일대를 포함한다.
영광빨치산 소속연대 불분명
유격전구가 형성됐다는 것은 남로당의 정치투쟁이 무장투쟁전술로 넘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 좌익무장세력은 1949년 7월부터 좀더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개편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인민유격대였다. 인민유격대는 3개 병단으로 편성됐는데 제1병단은 오대산지구, 제2병단은 지리산지구, 제3병단으로 태백산지구였다. 이들에 대한 지휘는 북에 있던 조선공산당 부위원장 박헌영 등이 담당했다.
제2병단의 조직체계를 보면 총사령부(사령관 이현상) 밑에 4개 연대(지리산의 제6연대, 백운산의 제7연대, 조계산의 제8연대, 덕유산의 제9연대)가 있고, 각 연대는 몇개 군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에서 영광지역은 어떤 연대에 소속됐는지 불분명하다. 당시 북한 조선노동당에서 도당에 이르는 조직체계가 인민유격대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영광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인민유격대에 소속된 부대가 아니라 군 조직의 지휘를 받는 부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인민유격대 조직들은 1948년 말부터 1950년 초에 걸쳐 진행된 군·관·민 합동토벌작전에 의해 조직적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와해됐다. 많은 유격대원들이 사살되거나 체포됐으며 살아남은 대원들도 유격활동보다는 생존을 도모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