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광지역에서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을 재현하는 발표회가 열렸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공옥진 여사의 작고로 단절될 위기에 처한 1인 창무극의 계승·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영광의 굿과 예술전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주제로 우도농악의 전경환 선생과 공옥진 여사 등 영광의 문화예술인들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한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본지에서는 영광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인이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로 지정된 고 공옥진 여사의 창무극과 예술세계를 분석한 목포대학교 이윤선 교수의 논문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공옥진의 창무극, 좁혀 말하면 <1인 창무극>이라고 한다.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등의 내용을 각색해 새로운 춤과 마임 등을 섞어 1인극으로 꾸민 것을 말한다. 홍보가, 심청가는 그중 대표적이다. 1인 창무극 공연은 대개 3부분으로 돼 있다. 공옥진류 살풀이를 추고 나서 흥보가나 심청가를 춤과 노래로 엮은 극이 끝나면 각종 동물춤과 재담으로 마무리한다. 이중 압권은 <병신춤>과 <동물춤> 등으로 호명되던 일종의 모방춤이다.
관련 논문이 석·박사 학위논문을 비롯해 10여편이 된다. 모방춤의 파격미에 대해 다뤘다. 판소리보다는 아무래도 춤을 통해 공옥진의 특징을 찾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가진 민중적 의미에서부터 철학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각양의 해석을 했다. 본고에서는 <1인 창무극>이라는 공연형태가 판소리의 발전인가 혹은 그 변형인가에 대한 언급은 피한다. 이를 분석하기에는 준비가 덜 돼 있기 때문이다. 주로 <병신춤>과 <동물춤> 등 모방춤이 가진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특히 공옥진의 ‘비틀어 쓴 몸짓’의 형성과 그 컨텍스트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공옥진의 예술특성이 판소리보다는 몸짓과 관련돼 있다는 판단에서다. 가히 역사상 유래가 없는 독창적인 춤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용학계나 민속학계에서 합의되거나 용인한 해석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논란이 지속될 수 있다.
공옥진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세세하게 리뷰할 필요는 없다. 글의 전개를 위해 몇가지만 언급한다.
1931년 8월14일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태어났다.
명창 공대일(1911~1990)의 2남2녀중 둘째딸이다. 공대일이 무가와 관련 있는 고사소리를 주로 연행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무계가 가진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대일은 박동실 문하에서 공부해 서편제의 줄기를 이룬다. 일제 강점기 광주 권번에서 기생들을 대상으로 소리를 가르쳤다. 아버지 공대일을 따라 다니며 소리와 춤, 민요 등의 소양을 물려받았다. 7세에 모친을 잃는다.
공대일이 일본 징용 영장을 받게 되고 당시 한국을 방문중이던 최승희(1911~1967)를 광주에서 만나 딸 공옥진을 몸값 1,000원에 판다. 징용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7년간 일본의 최승희 밑에서 가사일을 돌본다. 홀대와 천대를 받긴 했지만 때때로 최승희에게 춤을 익히기도 한다.
1945년 해방되면서 귀국한다. 귀국후 광주에서 각설이패들과 약 4개월 동안 생활한다. 이때 각설이들이 앉은뱅이, 곱사, 사팔뜨기, 외팔이, 절름발이, 곰배팔이, 언챙이 등이었다. 한국동란 때도 다시 광주 대양리 다리 밑의 각설이 거지들과 생활한다. 대략 1945년부터 1963년 사이 조선창극단에 입단하는 등 판소리꾼 활동을 한다.
남편의 외도, 첫아들의 죽음 등 곤핍함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고 불가에 귀의하기도 한다. 언어장애자인 남동생과 곱사인 조카가 있던 것도 주목할 대상이다.
33세에 영광으로 낙향해 요정 ‘연좌루’에서 생활한다. 이후 ‘옥진관’이라는 요정을 차리고 기생들과 생활을 같이 한다. 이때의 기생들과 각설이패 시절의 광대들을 모아 ‘공옥진국악단’을 만들어 영광 각지를 돌아다니다 예산문제 등 여러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창극단을 해산하고 만다.
1968년 동경에서 <곱사춤>과 판소리 <심청가>를 공연한다. 장기인 <병신춤>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거친 항의를 받고 좌절한다. 이후 옥진관으로 돌아와 인근에 기거하는 불구자들과 걸인들을 초대해 병신춤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때 창작한 춤이 <곱사춤>, <곰배발이춤>, <문둥이춤>, <절름발이춤>, <앉은뱅이춤>, <외발춤>, <엉치춤>, <동서남북춤>, <오리발춤> 등이었다.
1978년 공간사랑 공연에서는 57가지의 병신춤을 선보인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여러곳에서 공연을 한다. 다시 장애인들의 항의가 빗발친다. 장애인들에 대한 비하와 경멸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지 못한 때문이다. <병신춤>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됐다.
이후 <동물춤>을 창안해냈다가 1983년 판소리 수궁가를 바탕으로 원숭이, 호랑이, 곰, 퓨마 등의 동물을 모방한 1인 창무극 <수궁가>를 발표한다. 1998년 뇌일혈로 쓰러진다. 1999년 7월 동숭아트홀 대극장에서 <환자춤>이라는 이름으로 1인 창무극을 발표한다. 2010년 뒤늦게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라는 이름으로 전남도 지정 무형문화재가 됐다. 2012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예술생애주기별 특성
생애주기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거쳐야 하는 생활상태와 단계들의 연속선상에서 설명하는 개념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인용해 예술생애주기라고 부르고자 한다.
춤의 각 형태들을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지만 이중 대표적인 몇 개만 그려본다. 곱사춤은 가장 일반적인 춤이다. 곱사 흉내를 매우 코믹하게 그려 낸다. 곰배춤은 다리장애를 표현하고 문둥이춤은 손발 삭신이 오그라든 형태를 흉내낸다. 홀때기춤은 외발로 절뚝절뚝 걷는 모양새를, 똥구멍춤은 엉치를 내밀어 똥 누는 자세를, 소아마비춤은 소아마비장애의 형태를, 환자춤은 마비된 몸의 형태를 각각 묘사해낸다.
극중 인물의 모방춤도 캐릭터의 내면들을 각각 드러내며 형상화된다. 몸짓으로 서사적 담화를 뛰어넘는 형상을 추출해낸다. 예를 들어 흥부와 놀부, 혹은 놀부 마누라의 몸짓은 그 비틈 자체가 담화화 된다. 몸짓이 서사적 담화를 보완한다고 보기보다는 담화가 오히려 몸짓을 보완하는 형태라고나 할까? 동물 모방춤사위도 표현은 해당 동물의 움직임을 모사한 것이지만 그 내면의 세계에 오히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비장수, 갈치, 멸치, 별주부 자라, 토끼 등을 묘사하는 몸짓들에서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공옥진의 예술에 나타난 삶
그렇다면 어떤 생애주기별 특성들이 공옥진의 라이프스토리 속에서 거론될 수 있을까? 공옥진의 예술생애사적 특성에 따르면 대개 세개의 시기, 혹은 네개의 시기로 나눠진다. 앞서 김지원은 병신춤 형성기로 세개의 시기를, 김현정은 그의 논문에서 출생 및 성장기, 전통예능 학습기, 1인 창무극으로의 이행기, 본격적인 1인 창무극 활동기 등의 4기로 나눈 바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참고해 4개의 예술생애사적 특성별 시기로 나눠보고자 한다.
첫째 모방의 원리를 습득한 시기다. 출생한 1931년부터 최승희로부터 떠나 온 1945년까지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아버지 공대일로부터 배운 판소리, 고사소리, 민요, 춤, 재담 등이 가장 토대를 이뤘을 것이다. 하지만 병신춤, 동물춤 등에 나타나듯이 버려지고 천시된 것들의 몸짓을 모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모방의 방식들을 어디서 배웠을까 하는 점이다.
나는 이것을 최승희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횟수로는 7년간이지만 최승희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조선 전통이라는 소재들을 이용한 창작무로 무려 4년 동안이나 유럽공연을 지속하던 시절에 곁눈질로 혹은 직접 그 춤사위들을 배웠기 때문이다. 춤의 소재나 대상은 이질적이었다고 해서 그 모방이라는 창작방식은 승계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둘째 모방의 대상에 대해 주목한 시기다. 귀국한 1945년부터 본격적인 모방춤을 창작하기 이전인 1967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최승희가 모더니티한 몸짓 안에 민족, 전통 따위들을 녹여냈다면 공옥진은 어떤 대상에 자신의 몸짓이 가진 철학들을 녹여냈던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공옥진을 다룬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각설이들과의 생활이나 그 이후의 생활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견이 없다.
주로 이 시기는 귀국 후 광주에서 각설이패들과 약 4개월 동안의 생활, 한국동란때 광주 대양리 다리 밑의 각설이 거지들과의 생활, 1945년부터 1963년 사이 조선창극단에 입단해 판소리 활동을 한 것 등을 거론할 수 있다. 특히 2번의 각설이패들과의 생활이 공옥진의 이른바 병신춤에 대한 1차적 훈련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공옥진이 일부러 민중적 몸짓을 선택했다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 경험이 훗날 병신춤과 동물춤 등으로 공옥진의 이름을 한국 연희사에 남기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걸인 등과 샐활로 나온 병신춤
셋째 모방춤의 내용을 만든 시기다. 동경공연을 했던 1968년부터 서울 <공간사랑>에서 본격적인 병신춤을 선보였던 1978년까지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재일교포 광복기념 경축행사에 초대받아 동경에서 공연한 것이 기점인 셈이다. 이때 곱사춤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보며 상당한 회환을 가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후 영광의 옥진관으로 돌아와 인근에 기거하는 불구자들과 걸인들을 초대해 본격적인 병신춤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표면적인 모방에서 벗어나 대상과 완전한 일체감을 갖기 위해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한 셈이다. 곱사춤, 곰배팔이춤, 문둥이춤, 절름발이춤 등이 바로 옥진관 시절 주변사람들의 비난을 받아가며 창작한 춤들이다.
넷째 몸짓의 철학을 실현한 시기다. 1978년부터 2012년 작고까지다. 1978년 <공간사랑>에서 선보인 57가지 병신춤은 이른바 공옥진 춤의 철학이 실현되는 기점이랄 수 있다. 1979년에는 흥보가를 바탕으로 1인 창무극 <흥보전>을, 같은 해 12월에는 <명무전>에서 <허튼춤>을 공연했다.
1981년에는 뉴욕, LA, 일본공연을 했으며 같은해 9월에는 <공간사랑>에서 1인 창무극 <심청전>을 공연하고 <허튼춤>을 발표했다 1982년에는 이 공적을 높이 여긴 영광군에서 교촌리에 예술연수원을 개원해줬다.
사실상 좌절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살아온 인생의 의미를 ‘비틀어 쓴 몸짓’에 담아 정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최승희에게 대상을 모방하는 원리를 습득했고 해방 후에 2번에 걸쳐 각설이패와 생활하며 현장을 익혔으며 낙향해서는 영광이라는 공간, 특히 영광지역의 사람들을 스승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모두가 공옥진에게는 스승이었으며 공옥진이 주목했던 모방의 대상이 됐다는 뜻이다. 물론 언어장애자인 남동생과 곱사인 조카의 존재도 이후 공옥진 몸짓의 철학적 기반으로 작용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목포대 이윤선 교수
<다음호에 계속>